<씨네21> 편집실에서 내려다본 2010년 12월 마지막 주의 서울. 배경음악은 비틀스의
12월23일
수은주가 강파르게 곤두박질친 하루. 어렸던 시절, 비밀이란 컴컴한 침대 밑에 도사린 괴물처럼 무섭고 상서롭지 못한 무엇이었다. 마주보기 두렵고 식은땀에 젖어 꿈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그러나 인생은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가. 어른이 된 지금 내게 비밀은, 잿더미가 된 심장 깊숙이 묻어둔 불씨와 같다. 그것은 작은 강아지처럼 더운 숨을 색색거리며 내 안에 잠들어 있다. 파리하게 얼어붙은 밤거리를 걸으며 다행스러워한다. 너, 비밀조차 없었다면 추워서 어떡할 뻔했니.
12월24일
크리스마스 전야. 내 맘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미친 모자장수 흉내를 내며 다과 파티를 열기로 한다. 손님은 올해 영화 속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먼저 상석은 <셔터 아일랜드>와 <인셉션>에서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지 의심하는 나는 지금 어디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집중탐구하며 장자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몫이다. 욕봤다. 한해 동안 깨질 것 같았던 그의 머리를 치하하기 위해 멋진 모자도 증정한다. 미성년자 대표는 <하얀리본>의 무서운 마을 아이들이다. 그들의 괴물스러움은 몰락을 앞둔 문명의 징후였다. 근대적인 순진한 아동의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 시대에 어린이들은 은연 중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읽었다. 성인 인간과 똑 닮았으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다르게 행동하는 ‘종족’이기 때문이었다(꼭 어려운 이유가 아니라도 끝없이 요구를 채워줘야 하고 통제하긴 어려운 상대에게 겁을 먹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당연한 이치이긴 하지만). <하얀리본>은 호러의 문법을 거치지 않고 아이들을 향한 원초적 두려움을 일깨운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아이들 맞은편에는 눈빛으로 장내를 정돈할 수 있는 <초능력자>의 초인(강동원)을 배치해 불상사를 방지하기로 한다. 초인은 특이하게도 생활비가 떨어질 때마다 필요한 만큼 전당포를 터는 소극적 생계형 초능력자였다. 슈퍼히어로 출사표를 던지는 건 고사하고, 악당 역도 뒤쫓는 영웅(고수)이 나선 뒤에야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간신히 맡는다. 철저한 외톨이로 살아온 결과, 생각과 감정까지 타인을 통해 표현하게 되어버린 남자라는 점은 캐릭터의 그림자를 부각시키는 매력있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 캐릭터를 대성시키지 못했다. 못내 아쉽다. 초인이 어머니와 재회해 그녀의 눈을 통해 눈물 흘리는 장면은 더 선명하게, 여러 행인의 입을 빌려 자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더 대담하게 연출했다면 어땠을까.
<토이 스토리3>의 앤디는 좋은 성장의 좋은 예로, <예언자>의 말릭은 나쁜 성장의 좋은 예로 각기 초대하자. 반면 <유령작가>의 전직 영국 총리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은 외모, 학벌, 명예를 다 가졌는데도 들여다보면 중심이 텅 비어 있는 인간형의 표본이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과거 작품 <악마의 씨>를 닮은 이 영화의 구도를 더듬다보면 기실 유령은 아담 랭이 아닌가 싶다. ‘악마의 씨’ 말이 나온 김에 유전자 합성 생명체인 <스플라이스>의 드렌도 부르기로 한다. “섹시한 골룸”이라는 등 생김새에 관한 뒷말도 많았지만, 유전자보다 온갖 터부와 설화를 합성하는 기술이 더 현란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을린>(Incendies)를 보기 전까지는, 가장 기구한 출생의 비밀을 보유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12월25일
지하철 옆자리의 두 남녀가 “와이파이냐, 3G냐”를 놓고 설왕설래 중이다. 인터넷은 수도관이나 전선과 같은 파이프라인이 됐다는 인상이다. 좀더 무리하면 고속도로나 철도에 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현대인의 자유와 권리 행사에 불가결한 사회 기간 시설에 가까워졌다면 공공서비스로 제공될 수도 있겠다. 더욱 사정이 좋지 않은 미국이나 유럽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TV를 보았다. 비범한 재능과 매력을 지닌, 그러나 아직 형성 중인 젊은 배우들이 그들의 재능과 매력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혹은 유일한) 미덕인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보기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뿌리에 비해 비좁은 화분에 넣어진 식물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할까. 더구나 여기는 “밑져야 본전”이 드문 세계다. 허약한 프로젝트를 두세 차례 반복하고 나면 틀림없이 내 것이라고 여겼던 재능과 매력조차 더이상 재능과 매력이 아니게 된다. 살아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까다롭다.
12월26일
애니메이션 <너티 프로페서>는 DVD와 케이블 시장을 겨냥한 프로젝트로 짐작된다. 하지만 대중 장르영화의 난점은, 개봉관이라는 같은 리그에 진입하는 순간 겨냥한 관객이 누구이건 자본과 재능이 최고도로 집약된 프로덕션과 동일선상에서 평가받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극장에서 개봉하는 애니메이션은 픽사가 조정해놓은 눈높이와 경쟁하게 된다. 프로덕션 가치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작품들에 참신한 이야기나 상이한 미학의 발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12월27일
<너티 프로페서>의 원작은 제리 루이스가 감독, 각본, 제작, 주연한 1963년작 영화다. 유튜브로 제리 루이스의 쇼와 영화 장면을 찾아보다가 괴상한 기시감을 맛보았다. 짐 캐리, 스티브 마틴, 에디 머피, 폴 루벤스(피위 허먼) 등 제리 루이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동시대 할리우드 코미디언들의 연기를 먼저 접한 세대라면 비슷하지 않을까(물론 나는 지금 진본과 복사본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제리 루이스식 코미디의 불꽃 튀는 에너지는 전달하고 싶어 하는 내용과 그것을 도저히 한줄로 가지런히 정돈할 수 없는 퍼스낼리티 사이의 낙차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느다란 관에 밀려든 엄청난 부피의 물처럼, 루이스의 연기는 세찬 분수가 되어 빵 터진다.
슬랩스틱은 위대한 장르다. 즉각적인 웃음을 폭발시키는 동시에, 배우의 신체로 하나의 세계관을 그려낸다는 점에는 고도의 추상성을 지녔다. 오늘 본 심형래 감독의 <라스트 갓파더>에 실망한 이유는 이 영화가 몸의 코미디라는 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일인다역을 수행하느라 제작 성사에 많은 에너지를 빼앗겼으리라 이해하지만, 대중이 사랑한 영구라는 캐릭터에 대해 정작 그 창조자는 권태기에 접어든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혹시 영구를 사랑했던 기억의 기억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이 영화에는 <영구야 영구야> <동물의 왕국> <변방의 북소리>의 심형래를 소환하는 제스처가 있을 뿐 그토록 애써 지어올린 <라스트 갓파더>의 세계- 그것이 장르건 시대건 공간이건- 에 반응하고 그 안의 인물들과 작용을 주고받는 영구는 없다. 캐릭터를 부활시킨 영화가 도리어 캐릭터의 부고처럼 읽힐 때는 어찌해야 할까.
12월28일
내겐 청승맞은 습관이 하나 있다. 기차역이나 공항에서 사람들과 헤어질 때면 “어쩌면 이것이 내가 보는 그의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어”라는 불안감에 멀리 작아져가는 상대를 정지 프레임에 담아두려 애쓰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1월1일 사이에 걸쳐 있는 일주일이 주는 감각도 그와 비슷하다. ‘올해’는 아직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이별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심지어 어떤 해에는 빨리 청산하고 싶다는 욕구마저 품는다. 여기에는 약삭빠른 배신자가 된 죄책감이 동반된다.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나 4년에 한번 돌아오는 2월29일만큼 기묘한 기분까지는 아니지만, 12월26일부터 31일까지의 시간은 지상의 삶에 속하지 않는 것만 같다. 벌써 나는 2010년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확실히, 나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