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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포기는 없다. 계속 시도하고 부딪칠 뿐
이영진 사진 오계옥 2010-12-24

상암동 시대 6개월.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김명준 소장

“너무 재미없게 말했나?” 김명준 미디액트 소장은 인터뷰가 끝나자 너무 딱딱하게 답변한 것 같다면서 대신 걱정한다. “그럼 재밌게 하지 그랬어요!”라는 스탭들의 이구동성 타박을 들어서인지 그의 자책은 점심을 먹기로 한 식당에서도 계속이다. 사실 올 한해 복장 터지는 사건들을 연달아 감수해야 했던 그가 여유롭게 농담을 꺼낼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않았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비상식적인 공모에서 탈락한 올해 1월,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는 8년 동안 공들여 쌓아올린 광화문의 둥지를 등져야 했다. 회원들의 지지와 격려 속에 “나라가 안 하면 우리가 한다”며 상암동에 새 아지트를 마련한 지 6개월. 독립군의 심정으로 고군분투를 시작했으나, 모두를 위해 택한 가시밭길은 만만치 않다. 공적 지원 대신 구성원들의 희생으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미디액트의 기형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명준 소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머리가 복잡해졌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들었다. =여기저기 많이 고장이 났다. 원래 안 좋은 데가 있는데다 치아도 문제고, 시신경이 죽는 비문증도 전보다 심해졌다. 코랑 목도 안 좋고. 원래 잔병치레가 잦다.

-맘 편히 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일단 몸이 좋아져야 놀기라도 하지.

-올 한해 평생 잊을 수 없을 텐데. =좋게 말하면 역동적인 한해였다. 알다시피 실망한 일도 많았고, 반면 ‘돌아와 미디액트’의 응원처럼 감동적인 순간들도 있었다.

-9월 말에 영진위를 상대로 낸 영상미디어센터 운영사업자 선정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이 기각됐다. =행정소송은 다른 재판과는 다르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절차상의 문제를 따진다. 위원장의 전횡을 짐작할 수 있지만 법정에서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이른바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위원회 형태의 영진위가 그에 걸맞은 투명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 결과적으로 확인했다. 아쉽긴 하지만 법적 판단이 상식적인 판단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잖나. 결국 누가 잘못했는지는 다 알고 있고, 또 알려졌다고 본다.

-조희문 전 영진위 위원장은 행정소송이 기각되자 이를 근거로 언론 등에 자신이 음해당했다고 여러 차례 호소했다. =법적 판단에 대한 반응이야 자유긴 한데. 뭐 항상 그런 식이니 짜증도 안 나더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뒤늦게 근거 아닌 근거를 가져다 붙인 적이 어디 한두번인가.

-국정감사에서 집중포화를 맞은 뒤 조 전 위원장은 결국 11월에 해임됐다. 현재 조 전 위원장은 해임 취소 행정소송을 낸 상태다. =한때 이 정부의 사람이라고 했던 사람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걸 보면서 저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는 과연 뭘까 의아하긴 하다.

-조 위원장 주도하의 영진위의 실책을 바로잡기란 쉽지 않다. 그 와중에 정부는 내년부터 영상미디어센터를 직접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직영 방침은 동의하긴 어렵지만 이해는 된다. 거센 논란에 몰리다보니 결국 그런 선택을 했겠지. 다만 1년 전 공모 때와 마찬가지로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영상미디어센터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국민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변화하는 상황에서 영상미디어센터는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그게 있어야만 어떤 방식으로, 어떤 사람들이 이 서비스를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하는 거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왜 미디액트는 쫓겨났는가. 영상미디어센터 운영이 엄청난 기득권인 것처럼 말하는, 왈가왈부할 가치도 없는 비난을 제외한다면, 영진위는 영상미디어센터에 대한 어떤 비판도, 평가 작업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영진위는 왜 영상미디어센터를 직접 운영하려고 할까. 근거는 여전히 비어 있다.

-현 정부의 문화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청사진이 없다는 점이다. =미디어 융합 상황에서 정부와 관련 기관 그리고 영상미디어센터의 역할 재조정, 영상미디어센터 예산의 편중, 1년 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지역 영상미디어센터들의 운영 활성화, 이용자들의 자발성과 참여를 어떻게 확대할 것인지 등등 산적한 문제가 많다. 동시에 영진위는 부산 이전을 앞두고 있고, 영화발전기금 또한 몇년 안에 고갈된다. 이러한 이슈와 변수를 종횡으로 놓고 영상미디어센터에 대한 비전을 짜야 하는데 아무도 그걸 안 했고 지금도 안 한다. 그냥 3D 교육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공모의 방식이나 과정도 잘못됐지만 이러한 문제를 고민할 시간을 뺏겨버렸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상암동에 새로 공간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운영을 한 지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의 성과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빚을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서 무모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안 만들면 당신 죽일 거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필요성에 대한 압박이 많았다. 스탭들이야 센터가 없어도 뭉칠 수 있다. 하지만 회원들, 수강생들, 수많은 강사들, 지역의 센터들은 어떻게 하나. 뭐라도 만들어야겠다 싶었던 거다. 따지고 보면 지난 시기 미디액트의 긍정적인 기능들이 발목을 잡은 거지. (웃음) 거리에서 싸운다고 결과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우리는 좀 다른 그림으로 해피엔딩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채산성에 대한 고려를 했나. =의지들이 높아서 강좌 운영은 어렵지 않아 보였고. 그동안 공적인 서비스를 해왔는데 독립했다고 장비 대여 가격을 올릴 수는 없으니 이는 적자로 남게 되는데. 이 부분 또한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채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재정문제를 해결할 획기적인 상황이 잘 발생을 안 한다는 거다.

-공적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기존에 계획했던 사업들이 진척되지 못했을 것 같다. =찾아가는 미디어 교육으로서의 온라인 강좌는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비용을 생각하다 보니 강좌를 기획할 때도 실험적인 걸 해볼 수가 없다. 많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우리의 역할을 저버릴 수도 없고.

-필요한 후원금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광화문에 있을 때 연간 10억원 정도의 지원을 받았다. 지금은 그 절반 아니 1/5 정도라도 있으면 그에 맞는 효율적인 운영 방식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딱 잘라 얼마라고 말하는 게 굉장히 조심스럽다. 그 금액은 스탭들의 희생이 전제되는 것이니까.

-스탭들이 정상적인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받긴 하지만 생존의 수준도 안된다. 적어도 최저생계가 보장된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당연히 보장돼야 하는데 현재 상황에선 그것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별거 아니다. 있으나 없으나 센터 운영에는 지장이 없다. 다만 경험과 역량을 갖춘 스탭들이 계속 일을 할 수 있나 없나를 걱정하는 것을 보면 슬프다.

-해결책을 찾는 데 해외 사례가 도움이 되는 건 없나. =유럽은 공적 펀드가 굉장히 많다.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인디영화나 미디어 공동체에 대한 합의된 정책이 있고, 그에 따라 예산이 분배되기도 한다. 독일은 정당들과 연계된 재단들에서 미디어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기도 한다. 미국은 경제 위기 이후 어려움이 있지만 민간재단들이 많다. 반면 우린 이런 바탕이 전혀 없다.

-공적 지원 창구는 정부밖에 없는 셈인데. =쫓겨났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다. 계속 시도하고 부딪칠 것이다. 이명박 정부든 아니든 상관없다. 또한 교육, 지자체 등 권력 시스템의 일정한 분권화가 이뤄지고 있다. 그쪽에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요청하고 사업을 제안할 계획이다. 이전에는 공적 지원을 받는 터라 다른 기금까지 받으려고 하는 건 다른 단체들의 돈을 뺏는 불공정 경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미디액트 성격이 전혀 달라졌으니까. 그외에 숨어 있는 독지가들이 불현듯 나타나길 기대하는 마음도 있다. (웃음)

-새로 마련된 강좌를 보니 전과 달리 홍세화, 최규석, 최승호 등 명사들이 끼어 있다. =대중성을 위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순 없다. 다만 애초 취지는 강좌들을 새롭게 업그레이드해보자는 것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교류의 장으로서 미디액트는 그동안 학교의 역할을 했지만 좀더 공식적인 강좌를 통해 문화적인 교양을 제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역의 확대를 통해서 기존의 강좌들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도 따져볼 참이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미디어 운동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있었나. =대학 2학년 때 얄라셩이라는 영화동아리에 들어갔다. 영화가 좋아서는 아니었고. 그저 형(김홍준 감독)한테 재미있는 데 없냐고 했더니 거기를 일러주더라. (졸업 뒤에 감독이 된) 박광수, 송능한 이런 선배들에게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영화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뭐 이런 이야기 들으면서 보냈다.

-대학 시절 운동을 열심히 했나. =운동 열심히 하는 애들 만나면 ‘저 친구들 무슨 책 읽나’ 지켜보다가 나중에 사서 읽어보는 정도. 봐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던데. (웃음) 핵심활동가는 전혀 아니었다.

-89년부터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처음엔 촬영, 편집 등 제작 일을 하다 93년부터서 제작 외 연구, 교육, 국제업무 등을 맡았다. 사회운동의 퇴조와 맞물려 노뉴단도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바깥에선 미디어 운동이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 직접 보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이 있어서 해외에 자주 갔다.

-출장비를 받고 간 건 아닐 테고. =아르바이트해서 통장이 좀 차면 여비로 썼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긴 하다. (웃음) 코미디도 많았다. 지금이야 국제연대 전문가처럼 취급당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처음 간 곳이 인도에서 열린 회의였다. 난 그때 비행기표는 출국하는 날 공항 가서 사는 줄 알았다. 창구에서 ‘티켓이 얼마냐?’고 물어봤더니 다 뒤집어지더라. 스코틀랜드 회의 때는 그쪽에서 우편으로 뭘 보내왔다. 영어로 되어 있어서 나중에 뜯어봐야지 했는데 알고 보니 한달 전에 신청을 하면 항공비와 체제비를 대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돈 날리고 자비로 갔다. 회의 참석해서는 말도 안되는 발언도 많이 했다. 공동체 미디어에 대한 논의를 하는데 나한테 발언 기회가 주어지면 노뉴단 소개문을 계속 읽기도 했고. 다행히 다들 이해를 해주더라. 처음 와서 영어도 못하고, 맥락도 모르니, 일단 들어주자 그런 거지. 어쨌든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공부한 것이 나중에 자산이 됐다. 회의만 참석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서 퍼블릭 액세스 운동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직접 보고 찍고 모르는 것은 또 물어보고 그랬으니까.

-퍼블릭 액세스, 영상미디어센터. 처음엔 다들 생소하게 여겼을 텐데. =한국 독립영화 진영은 한국독립영화협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업을 선도적으로 해냈다. 지금에 와서는 왜 한 단체가 그동안 그 많은 사업을 다 했느냐고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퍼블릭액세스나 미디어 교육에 대해 이해가 있진 않아도 기본적인 공감이 가능했다.

-예전처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을 때는 없나. =한국의 독립다큐멘터리를 봤을 때 삶의 현장, 투쟁의 현장들에 밀착하는 전통이 강하다. 그것도 소중하지만 주류 언론의 탐사 저널리즘처럼 분석적인 다큐멘터리도 나왔으면 좋겠다.그쪽 분야도 개척됐으면 좋겠는데 나보고 하라고 하면 글쎄.

-내년 상반기가 가장 큰 고비다. =그 고비만 넘기면 좀처럼 안 꺾일 것 같다. 이 기사를 읽을 독지가들에게 빨리 후원하는 것이 비용 대비 효율성이 높다고 귀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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