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류승범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언제나 에너지, 본능, 들끓는 무의식의 어떤 것. 이런 동네의 단어들을 사용해왔다. 누구도 이견은 없었고, 그 밖에 다른 식으로 그를 표현할 길은 없다고 단언들을 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는, 몇편 되지는 않지만, 내가 시나리오작가로서 참여했던 작품 중, 활자로 표현된 모든 것- 행간의 뉘앙스부터 마침표, 쉼표, 한톨까지 깡그리 펄펄 끓게 만든 독보적인 배우였다. ‘집어삼켜-소화하고-폭발한다.’ 연기의 이상적 삼 단계를 그냥 한 호흡으로 씹어 뱉는, 분출의 전율과 쾌감. 작가에게까지 그걸 전이시켰던 배우는, 그가 유일했다.
2008년, 감독 대 배우로서 그를 다시 만났다. 당시 배우 류승범은, 아니 이십대 청년 류승범은, 서른을 막 앞두고 있을 때였다. 대략 묘사하자면 그는 좀더 깊었고, 좀더 넓었고, 좀더 기분 좋게 풀어져 있었다. 본능과 직관으로 움직이는 배우라고 여겼으나 정작 그는 이성과 감성 양쪽으로 깊게 사고하는 배우였다. 더불어, 자신의 지난 이십대를 돌아볼 줄 아는 청년이었다. 삼십대 문턱에서 이십대 못지않은 청춘을 몇뼘 더 연장하겠다는, 으레 배우라면 가질 법한 태도가 없었다. 그리고 서른이 된 류승범은 한해에만 네편의 필모그래피를 추가한다. <용서는 없다> <방자전> <부당거래> <페스티발>. 제각각 성격이 판이한 네편의 영화를 관통하며, 우리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는 류승범의 온도를 경험하게 된다. 구태여 그 변화를 말로 푼다면 이런 식일 듯싶다. “뿜는 배우에서, 품는 배우로.” 스크린을 찢듯이 맹질주하던 에너지가, 자신까지 할퀴어가며 남김없이 폭발하던 화가, 달라졌다. 자신을 차갑게 비우고도, 상대 캐릭터에게 많은 것을 내주고 한발 뒤로 빠지고도, 밑동 두둑한 존재감을 빛내기 시작한 것이다. 본인 캐릭터를 뿜어내기에 앞서 극 전체를 품어내는, 한발 성큼 내딛은 그곳에서, 류승범은 새로운 청춘을 살아내기 시작했다. ‘이 배우가 언제 어떻게 끓어넘칠 것인가’만을 고대하던 모두에게, 보기 좋게 명쾌하고 경쾌한 콜럼버스의 달걀을 내놓은 셈이다.
근래 들어 그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종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한, 산다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향후 그의 필모는 한편 한편 단발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모든 작품들을 과정으로 두고 보다 큰 그림하에 품는 혜안으로, 인간 류승범의 삶과 유기적일 것이다. 그러니 더 강렬해질, 더 깊어질, 이 배우에 대한 기대감을 어쩌겠나. 숨길 도리 있겠나. 앞으로 꼼짝없이, 지켜보며 기대할 수밖에.
올해의 장면
페스티발 <페스티발>. 상두(류승범)가 집 마룻바닥에 하이힐들을 늘어놓고 앉아 먼지를 터는, 두컷짜리 신이 있었다. 당시 현장 모니터를 통해 그를 마주했던 때가 아직 명징하게 기억나는데, 짧은 순간 반짝하고 뾰족하게, 그 어떤 디렉션으로도 전달되어질 수 없었던, 진짜-진심이 그의 얼굴에 묘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액션도, 대사도 없는. 그저 ‘구두를 만지고 턴다’뿐인 브릿지 씬이었는데. 그의 안면 근육 하나하나는, 눈빛의 미세한 하나하나는, 섬세한 호흡의 하나하나는, 화면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전부. 진짜.로 만들어버렸다. 내가 제시한 무설정의 설정 위에, 류승범은 그렇게 더운 심장을 선뜻 이식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