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전우치>를 시작으로 2월의 <의형제>와 11월의 <초능력자>까지, 올 한해 강동원은 잇따라 세편의 작품을 관객 앞에 내밀었다. 스코어 역시 기대만큼 좋다. 하지만 이 영예가 그의 파트너에게까지 이어지진 못한 듯하다. 유일한 여성 상대역 임수정이 그랬듯, 버디무비에서도 그는 혼자 살아남는다. 신 수에서 우세한 고수는 강동원에 가려졌고, 예상치 못했지만 ‘송강호의 <의형제>’란 단어 조합도 익숙지 않다. 강동원의 위상이 어느덧 우리가 기대한 좌표를 넘어선 게 아닌가 생각게 되는 대목이다.
‘문체를 갖지 않는 작가’가 졸렬하다고 평가받는 것에 대비되어, 배우들은 스스로 자신이 만든 문체에 얽매이게 될까봐 조마해한다. 그러니 강동원의 필모그래피가 양식(style)에 대한 자기부정을 내비치는 것을 지켜보는 건 흥미롭다. 이 과정에서 그는 <늑대의 유혹>을 통해 형성된 청춘스타의 이미지가 소진되기 전에, 적용 가능한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걸 스스로 깨달은 듯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꾸준히 편차를 주려 노력했다. <전우치> 이전의 작품에서 스타성을 무기로 한 프로젝트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건 그 방증일 것이다.
그래선지 2010년 그의 행보는 유독 반갑다. 올해 개봉한 작품에서 그는 다만 대중의 기대치만을 겨냥한다. 어느샌가 영화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방법을 이야기하는 태도가 낯설지 않고(<씨네21> 777호), 제작 자본의 담보가 될 수 있는 몇 안되는 배우란 사실을 그 자신도 꿰뚫은 듯 느껴진다. 하지만 곧 시작될 공백을 의식해서였을까? 강동원은 대중과 활로를 넓히는 데 이 1년을 전부 소진하진 않았다. <의형제>의 캐릭터는 국정원 직원이 아닌 ‘간첩’이며, <초능력자>에서는 정의엔 관심없는 ‘이기적인’ 초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관객의 손을 잡고 무작정 달리려 들지 않았다. 이 음침한 주역들을 통해 표층적으로 습득한 그의 위상은,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신비다.
고다르는 할리우드의 대형 프로젝트에 있어 스타의 역할이 마치 ‘파시즘의 독재자’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청춘의 권력자들이 관객을 통해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파시스트의 애국심을 상기시킨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강동원의 행보가 이에 걸맞다. 앞으로 2년이 이 궤도를 어떻게 바꿀지 미지수지만, 언젠가 그가 다시 스크린에 돌아올 때 그에 매료되었던 대중이 과거를 완전히 잊진 못할 거란 확신은 든다.
올해의 장면
<초능력자> <초능력자>의 오프닝 시퀀스, 그곳엔 정어리떼가 든 수족관을 바라보는 초인 역의 강동원이 서 있다. 영화 전반부에서 상대역 고수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데도 후반까지 강동원이 이야기의 중심축에 놓일 수 있던 건 순전히 이 시퀀스의 강도 때문이다. 저비용 고효율의 좋은 예인 셈. 이때 내레이션으로 읊조리는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란 대사는 <전우치>에서 외치는 “이 도사 전우치가!”와 어우러져, 우리가 바라보는 강동원이란 배우를 직접 그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누구라도 소화하기 힘들 것 같은 파마머리의 정면 클로즈숏이 느닷없이 다가오는 느낌도 좋다. 현재 강동원이 가진 티켓파워의 위력을 영리하게 활용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