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마가 있다. 전례없이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이 살인마는 자신의 살인이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약자가 저지르는 정당한 폭력이라고 우긴다. 모터사이클 선수, 퇴역군인, 가출소녀가 차례로 죽어가는 가운데 사회는 거세게 요동치고 대중은 살인마에게 압도당한다.
소설은 관련자들의 시선을 통해 살인범을 쫓는 과정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가출소녀의 죽음에 격분한 정의파들이 있다. 이혼당한데다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는 중년의 형사와 한때 싸움 짱이었으나 스포츠댄서로 전향한 남학생. 이 반대편에는, 추리를 즐기며 살인범의 마음을 엿보고자 하는 심리분석파가 있다. 아버지에게 받은 트라우마를 껴안고 살아가는 피해자심리전문요원과 경찰이 기분 나쁠 만큼 수사의 허점을 잘 짚는 기자. 어디선가 볼 법한 이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한국사회의 어두운 풍경이 하나둘 드러난다. 가출 청소녀들의 밤거리 생존 전략, 군대와 학교와 어린이집의 폭력, 나아가 살인범의 편지가 하나둘 노출되며 그것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언론과 정치권의 모습까지.
무난한 제목과 달리 지독하리만큼 디테일한 묘사가 뛰어난 소설이다. 꼼꼼해서 인상적인 대목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밤안개 낀 도시의 환락적인 풍경, 국과수에서 피해자 시신을 부검하는 과정, 소방관들이 목숨 걸고 뛰어든 화재 현장. 기름기 쫙 빼고 상황을 냉정하게 또 편향되지 않게 바라보려고 애쓴다. 시사주간지 출신 저자는 “기자들의 복수는 유치하고 치명적이다”라는 웃음 나는 문장을 날리기까지 한다. 소설은 사적 폭력을 원하게 만드는 뒤틀린 풍경과 약자를 괴롭히며 쾌락을 느끼는 변태적 심리가 사회 곳곳에 퍼져 있고 그 원인을 도려낼 수 없다는 걸 짚으면서도, 개개인의 건강한 정신에 희망을 거는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그간 온갖 엽기적인 사회 뉴스를 진물나게 읽었을 직장인으로서의 삶에서 작가가 얻은 교훈일까. 일본의 사회파 추리물을 좋아하는 독자나 추리소설에 특별히 관심이 없어도 압축적으로 묘사된 사회의 단면을 엿보고픈 이라면 반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