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급한 순간에 오히려 우스갯소리를 만들어내는 버릇이 있다. 그렇다고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는다 자부할 배포는 아니고, 뭐랄까 맘 같지 않은 상황에 처했을 때 그에 대한 신경질적인 개그를 사정거리 안에서만 들을 수 있게 꿍얼대며 답보상태를 버틴다고나 할까. 중학생 때 어두운 놀이터 근처를 지나다 두어살 위 동네 양아치들에게 붙들려 작은 봉변을 당했을 때- 한달 용돈 3천원이던, 따라서 일일한도 100원이던 시절, 그날따라 최진실 브로마이드가 있는 청소년잡지를 지르러 가던 길이라 4천원 정도 여유가 있었던가- “너 돈 있냐?” “아니요.” 따귀를 두어대 맞고 그 깨알 같은 잔돈을 뺏기는 동안 스스로를 위로하는 한 네댓가지 유머를 생각해냈었다. 그중 그나마 입 밖으로 뱉은 말장난 아닌 말장난. “너 이름이 뭐야?” “예, 류열호요.” “거짓말하면 죽는다.” 옆의 낯익은 양아치는 긁적긁적 “얘 윤 뭐시기였던 것 같은데.” 내 가방에서 교과서를 무지막지 꺼내는 손길들. 그런데 정말 그 속지마다 거짓말처럼 적혀 있는 가짜 이름 ‘류열호.’ 십대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의 성을 부정하고 싶어 굳이 엄마 성 ‘버들 류’자를 앞세운 가명을 자족 차원으로 교과서마다 적어놓았는데(정말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烈)이란 한문이 멋있게 느껴져서 중간에 삽입) 바짝 긴장한 상황에서도 굳이 그 3음절을 대는 마음 “제 이름 진짜 류열호예요.” “응, 얘 이름 류열호 맞네. 형들이 네 이름 기억했으니까 어디 가서 아무 소리 하지 마.” “예!” 돈 뺏기고 따귀 맞고서는 그거 하나 속였다고 그 와중에 속으로 킥킥대던 기억. 자기만 아는 덧없는 자기기만.
지젝의 근작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김성호 옮김, 창비 펴냄)에 비슷한 맥락의 농담이 소개되어 있다.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의 러시아. 한 농민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가다 몽골 장수를 만나게 된다. 몽골 군인은 여자를 강간하겠다며 첨언하길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욕보일 동안 너는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라.” 군인이 못된 짓을 마치고 떠난 직후, 농민은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어이가 없어진 아내가 파안대소의 이유를 묻자 이 미욱한 아저씨가 답하길, “저 녀석한테 한방 먹였어. 저놈 고환에 먼지를 묻혔다고!” 지젝은 한가로운 좌파에게 일갈을 하기 위해 이 예화를 인용했지만, 농담이 해학은 되지 못한 채 자기기만에 봉사할 경우의 해악을 드러내기에도 충분한 사례. ‘그렇게 자족하다간 그 노예 상태를 영영 벗어날 수 없다네.’
실언자나 올리는 자나 모두 같은 심리
연평도 폭격 직후 웹에는 어떤 일반인들의 실언을 스크랩한 게시물이나 짤방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엄연한 실제의 ‘폭격’을, 마침 맞은 지인 생일의 ‘축포’라는 식으로 철없이 전유한, 조금 약하고 못난 보통 사람의 멘션들. 다만, 나는 그 경거망동의 동력이 조금 이해가 간다. 사람이 죽은 상황에서의 비매너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항문에 힘줘야 할 상황에서 되레 재미없는 유머를 양산하는 패턴이 흥미롭다는 이야기. 초반에 언급한 내 스스로의 사례처럼, 약자일수록 또는 자기가 처한 게임에서 어찌 생존해야 할지 데이터가 부족한 사람일수록 방어적인 농담을 괜스레 구사하곤 한다. 미련한 처신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감각. 그걸 말로, 글로, 조금 못난 서사로 풀어내는 건 인간적인 거고….
그 약함의 증거들을 굳이 모아모아 전파하며 단죄하려는 이들- “여러분, 이 생각없는 게시물을 올린 00녀를 혼내줍시다!”- 의 심리도 결국은 마찬가지. 자신이 뭔가를 자제시킬 수도, 확대할 수도, 직접 방어에 나서거나 당장 몸을 피신할 도리가 없는 가운데, 이 상황에서 적어도 저울질할 여유와 식견은 있음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온라인의 이웃에게 전시하며 이 답보상태를 버티려는 역시나 속절없는 운동. 결국 상황을 우리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암울한 상황에서 ‘아니야, 나는 이 패턴을 파악하고 있다’며 자신과 주변을 다독이는 가련한 자위. 다만 여기서 서로가 서로를 할퀴지 않으려면 일정한 도약과 간격이 필요하겠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게임의 일부. 우리의 덧없는 개그들은 이 게임의 중력에서 우리가 잠시나마 얌체공 행세는 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안쓰러운 기획. 미덕도 악덕도 아닌 불가피한 동행. 누드가 그려진 옷으로 누드를 감추는 우리.
그 모든 농담은 하나로 귀결 ‘전쟁은 안돼!’
마무리. 경애하는 작가 커트 보네거트께서 “유머는 공포에 대한 반응이자 신을 찾아서 안도하고 싶은 몸짓이다”라고 읊조렸던 걸 보면, 방어적인 웃음은 인류의 보편적인 증상인 것 같다. 2차대전 당시 뒤늦게 미군 보병으로 징집됐던 커트 보네거트는 독일의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서, 그 자신 연합군의 신분으로 아군의 네이팜탄 폭격을 사흘밤낮 겪는다. 수십만의 생명이 단 사흘 만에 사라진 도시를, 아니 도시 자체가 없어진 상황을 직접 목도한 뒤 남은 한평생을 인류를 상대로 기이하고 엄숙한 농담만 해댄 보네거트 선생님은 3년 전 세상과 작별했지만, 그의 소설 속 화자들은 여전히 후방병원의 침대에서, 지구에서 한참 떨어진 위성에서, 몇 억년 뒤의 해안에서, 기억을 상실한 환자가 되어, 또는 고대의 어류가 되거나 심지어 실체가 없는 홀로그램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싱거운 농담들을 해댄다. 그리고 그 모든 농담은 하나로 귀결된다. ‘전쟁은 안돼!’ 좀더 길게 풀어 써보자. “인생의 목적은, 누가 우리를 조종하고 있든지 간에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커트 보네거트 <타이탄의 미녀> 중에서)
ps. 개인들의 실없는 농담에 관대해지자는 취지의 글을 쓰는 지금, 한나라당 안상수 최고위원이 불에 그을린 보온병을 들고 북한군의 포탄이라 얘기하는 동영상을 보게 됐다. 이어서 이 동영상이 조작이라는 여당의 발표. 곧바로 그 발표가 거짓이라는 카메라기자연합회의 근거있는 반박. 불안한 나머지 못난 유머를 발설하곤 눈치를 보는 개인과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을 지속적으로 당당히 중계하는 고위직은 구분해야 할 카테고리. 따라서 정정하자. 보네거트 선생님도 모두를 사랑하라 말씀하신 건 아니다.
“이 비정한 정신병자들은 현재 정부의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다. (중략) 그들은 하루가 멀다 않고 빌어먹을 짓들을 해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략) 그들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그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군대를 동원하라! 공립학교를 사립화하라! 이라크를 공격하라! 의료혜택을 줄여라! 국민의 전화를 도청하라! 부자들의 세금을 줄여라! 수천억달러짜리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라! 인신보호법과 환경단체와 진보매체를 엿먹여라. 내 엉덩이를 닦아라!”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