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범 감독의 <페티쉬>는 미국 독립영화계 안에서 만들어졌으나 한국의 스타급 여배우 송혜교가 출연했다. 결혼한 뒤 미국 기독교 집안에 이민 온 숙희라는 여인에 얽힌 어두운 사연이다. 그녀는 무속인의 딸이며 그녀를 둘러싸고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페티쉬>는 제작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일종의 문화적 교집합의 영화다. 영화의 개봉을 맞아 손수범 감독이 한국을 찾았다. 그에게 <페티쉬>와 미국에서 독립영화 만들기에 관해 들었다.
-<페티쉬> 제작 계기는.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 갔고, 미국에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다. 문화적으로 보면 반반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온전히 한국 사람이지만 미국 문화를 많이 접하게 된 거다. 그 경험으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문화가 만나서 교집합이 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속인의 딸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있나.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났을 때 좋은 면만 발생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충돌하고 갈등이 생긴다. 미국의 이민 1세대는 기독교 커뮤니티가 중심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통적인 정서는 샤머니즘적인 게 있지 않나. 그런 데에서 오는 서로 다름을 보고 싶었다.
-그게 오랜 미국 생활의 경험이나 생각과 연관이 있는 건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게 무언가를 ‘통해서’ 하려고 하지 않나. 상황을 바꾸면서 행복을 추구하려고도 하고, 자신을 바꿔가면서까지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진짜 우리 모습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추구하려는 행복은 무엇인가. 미국에 간판 따겠다고 가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대다수는 그곳에 행복을 추구하러 가는 것이지 않나. 하지만 막상 가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고, 돌아오기도 어려운 상황이 생긴다. 영화 속 숙희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캐릭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거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다. 숙희는 그 기득권 안에서 살아남으려 한다. 일종의 그런 것에 관한 은유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아이덴티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그걸 리얼리티로 풀고 싶지는 않았다. 은유를 통해서 풀고 싶었다. 허구의 영화적인 장치를 통해서.
-연출을 하기 전에는 촬영감독이었다. 영화 <사과>를 촬영했다. =중앙대 사진 전공이다. 그 뒤 AFI에서 영화 촬영을 전공했다. 사진은 단어의 뜻을 이미지로 정확히 익히는 것이라고 봤고 영화 촬영은 그 사진들을 나열해서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봤다. 그 다음 뉴욕대에서 다시 시나리오와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이미지를 나열해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가 나의 관심이다.
-뉴욕대 영화과 졸업작품이라고 들었는데. =학교를 마친 건 2002년이고 그 사이에 <사과>도 찍고 다른 일도 했으니까 정확히 졸업작품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웃음) 기자재 등을 학교에서 빌려 썼다.
-한국에서는 스타급 여배우인 송혜교가 출연한 것으로 주목을 모았다. =사실 미국은 배우들이 항상 스튜디오 영화에만 출연하는 건 아니다. 배우로서 작가주의영화나 독립영화에도 많이 출연한다. <페티쉬>의 캐스팅 디렉터가 부산영화제에 초청받아 갔을 때 송혜교쪽과 연락이 닿았고 송혜교가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했다. 영상통화를 많이 했다. 나도 그녀가 캐릭터에 부합한다고 봤다.
-미국에서 이 영화의 반응은 어떤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컨템 포 아시안’이라는 행사에서 이 영화가 상영됐다. 일년 동안 전체 아시아영화 중 8편을 선정해 편당 일주일씩 상영하는 것이다. 그냥 그림자 하나 그렸다고 거기서 전시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겠나. 내 영화를 하나의 경향 안에 넣고 보는 것 같다.
-영화에 대한 미국, 유럽, 한국의 반응이 많이 다른가. =특히 독일에서는 계급 이슈와 사회성을 많이 본다. 이민자가 이민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많이 물어본다. 뉴욕에서는 미학적인 면에서 관객과 토론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길게 토론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주로 배우에 대한 것, 스토리에 대한 것을 많이 물어본다.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페티쉬> 외에 어떤 작품들이 있나. =영화 촬영을 많이 한다. 대표적으로 올해 부산에 초청된 라트비아·스웨덴 합작영화 <라핀스 중사의 귀환>이라는 영화의 촬영감독을 했다. <해피 뉴 이어>라는 영화도 촬영했고.
-연출 계획은. =전에 내가 만들었던 <물 속의 물고기는 목말라 하지 않는다>라는 단편이 있다. 거기 나왔던 캐릭터가 10년 뒤에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해졌다. 영화 제목은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아라>다. (웃음) 다른 영화로는 미국 요리사가 우리나라 절에 가서 요리를 배우는 <템플 푸드>도 생각하고 있다. 항상 시차 적응을 잘 못해서 잠을 못 자는 비행사 이야기도 생각 중이다. <학의 다리…>가 아마 가장 빠를 것 같다. 시나리오는 다 썼고 제작사를 찾는 중이다. 하지만 요즘은 미국 독립영화쪽도 많이 힘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