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받씨로부터 오랜만에 먼저 연락이 왔다. 한받씨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르는 홍대의 자립음악가. 인디뮤지션이라는 분류 대신 굳이 ‘자립음악인’이라는 호명을 그가 고안한 이유가 한글사랑과는 무관한 것이, 이 양반이 통기타를 치며 중생의 외로움을 달랠 때는 ‘아마츄어증폭기’, 노트북을 동반한 채 댄스음악을 제공할 때는 ‘야마가타 트윅스터’. 중간에 잠시 꾸리던 펑크밴드의 이름은 ‘스트레칭 저니’. 그리하여 한받씨가 고수하는 ‘자립’이라는 단어는 ‘인디’의 번안이 아닌, ‘인디’ 또한 틈새상품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아예 시장을 넘어선, 그런데 시장을 넘어선다는 것이 일단은 불가능한 세상이니까, 애초에 실패를 전제한, 그러나 더 나은 실패를 하기 위한 언어투쟁. 다만 내가 풀고 싶은 ‘썰’은 좀 다른 방향.
한받씨와 처음 만난 건 2003년 겨울, 작은 비디오페스티벌의 사전모임. 둘 다 ‘비디오작가’라는 타이틀을 건 채- 말 그대로 정말 그런 카드를 목에 건 채- 인사를 나눴었다. 금빛 가발을 쓰고는 자신의 뮤직비디오를 CD에 구워와 2천원인가에 판매하는 모습이 도드라졌다. 다음해 복학한 학교에서 기술조교라는 명칭으로 근무하는 그를 다시 만났다. 그제야 본명이 한진식이고, 한받이라는 닉네임의 스펠이 ‘한밭’ 아닌 ‘한받’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직전까진 그 조근조근한 대구 억양을 들으면서도 상대를 대전 출신으로 인지한 나의 무심함. 장발에 호젓한 걸음새, 속세에서 안달하는 처세책 표지모델과는 거리가 먼(특히 치아 상태가) 풍모의 한 조교를 흠모하는 친구도 몇 있었지만, 별스런 기운의 소유자들을 만나면 질투부터 하는 나로서는 그닥 어울릴 일이 없다가 어떤 영문인지 함께 통음을 하고 한받씨의 녹음실에 간 적이 있다. 스튜디오래봤자 계란판이랑 스티로폼 등을 덧댄 아현역의 반지하방. 한받씨의 장단에 맞춰 내가 기타솔로를 하는 식으로 밤새 ‘잼’을 즐겼던 기억. 참고로 내가 기타를 쳤다는 건, 말 그대로 ‘쳤다’는 거다. 연주가 아닌, 정말 아무 소리라도 났으면 하는 마음에 그의 기타를 ‘치고 패는’ 동안 한받씨는 성실하게 베이스 반주를 해주었다. “한받씨, 제가 소질이 있나요?” 특유의 덤덤한 목소리로 “예, 재밌습니다”.
우리는 결국 막역한 사이는 되지 못했지만 그 뒤 여러 해 동안 내 딴엔 중요한 시절의 길목마다 한받씨의 음악이 있었다. 서툰 첫 이성교제가 끝나고 통증보다는 통증에 대한 호기심으로 난봉을 부릴 때 문제의 ‘잼’을 공유했고, 다음 사귀던 친구와 지방 나들이를 갔다 처음으로 대판 싸우던 순간, 마침 근처에서 거리공연을 하던 그를 마주치고는 한절 노래를 청하는 이벤트로 상황을 미끄러뜨린 적도 있었다. 그때 아마츄어증폭기가 불러준 레퍼토리는 아마도 “아임 저스트 원트 섹스 위드 유”를 서정적으로 반복하는 <룸비니>. 그 주문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 뒤로 한참 제 멋에 겨운 작업만 하면서도 옆사람에게 사랑받고 응원받는 호시절을 보냈다. ‘제 멋에 겨운’ 작업들이 좀 밋밋할라치면 한받씨에게 급전화를 걸어 반짝등장을 부탁하곤 했고, 이는 대개 ‘아마츄어증폭기’라는, 틈새의 예술자본을 대가없이 이용하려는 수작이었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다.
내 작업의 영양소, 비타민C, 곡식의 씨
2년 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한받씨가 잠시 매니저를 보던 홍대의 술집에 예전보다 더 절망적인 상태로 앉아 있었다. 민폐 끼칠 동무도 없던 서른살, 실연과 절교는 전처럼 흥미로운 텍스트가 아니라 이젠 그저 낭패의 집합.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런 나 좀 살려달라며 기타 한곡 레슨을 청했을 때 골목에서 매니저 한받이 세 가지 기타 운지로 가르쳐주던 <금자탑>이라는 노래의 소절, “아니 아니 아니에요 나는 그냥 탐욕스런 소년이지요.”
통속적으로, 그러나 정말 고맙게 통속적으로, 그 심플한 코드들을 튕기며 새로운 누구에게 설레는 마음을 고백할 기회가 다시 생겼고, 노래의 영험함 덕분인지 가련한 청원을 선선히 승인받고는 다시 1년, 2년, 3년. 늘 그렇듯 무심한 연애의 패턴은 반복되고, 달라진 게 있다면 바깥에서 좀더 규모있는 작업을 요구받게 됐다는 점. 그 사이 아마츄어증폭기는 또 한번 가내수공업 앨범을 발매했지만 전에는 흥미롭던 저음질 리프들이 그때부턴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 성사되지 못한 상업영화를 하나 준비하던 중 직접 구운 CD를 보도에서 판촉하던 아마츄어증폭기를 만난 날, 저 CD를 진행경비로 한장 살까 영수증 처리를 고민한 정도의 감상. 또 1년, 음악감독을 따로 섭외해 첫 장편을 작업하다 도저히 원했던 ‘삘’이 나오질 않자 한받씨를 급수배해 <연가>의 가창을 주문했던 기억. 그렇게 밥상은 차려드린 적 없이 곶감만 빼먹은 몇해, 왠지 찔리는 마음에 떳떳한 청중이 되진 못하고 그이 블로그의 고민- 음악노동자로서 주류의 유통에 기대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방법, 작게는 인천에서 공연을 마친 뒤 돌아올 차비가 없어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될 방법에 관한- 을 흘낏거리며 ‘난 좀더 잘나가는 창작자가 되자’ 정도의 다짐이나 하던 지난해, 모처럼 한받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성호씨, 제가 아마츄어증폭기로서는 마지막이 될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추천사를 써주시면 어떨까요?” 긴 연애가 다시 파투나고 후유증을 겪던 나는, 그의 앨범 <<수성랜드>>를 응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달래기 위해, 혹시나 기적 같은 재회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맘속 수신인은 따로 있는 글을 보냈다.
“아마츄어증폭기의 노래는 여전하고 C7에서 Dm7을 오가는 코드 또한 여전한데 어느 사이에 나는 애인도 없고, 애인과 지내던 자취방도 없어지고, 그 어느 바람 마른 종로나 신촌, 가끔은 회기나 석계 거리 끝에 헤매인다. 우리는 한 봉지 천원 덜 마른 풀빵에도 흥겨워했지만, 어느새 못난 가능성들을 저울질하게 된 나 때문에, 고유명사 없는 대의명분을 방패삼던 나 때문에, 남도 아닌 내 삶을 구경하던 나 때문에 그 좋은 시절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나는 섹스나 좋아하고 사람 마음 만질 줄은 몰랐지. 뒤늦게 혼자 먹는 떡볶이들은 정말 철근과도 같아. 내일은 수상한 치과에 턱관절을 만지러 가서 오링테스트에 속아줘야지. 어차피 이렇게 될걸 미리미리 많은 예쁜 것들에 속아줄걸. 아마츄어증폭기의 주문 같은 노래를 듣다 보면 알고도 속고 몰라서 속아줄 텐데.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돌고 돌겠지. 수성도, 지역경제도, 우리의 맘 같지 않은 말도, 말 같지 않은 마음도 돌고 돌겠지.”
달빛요정이 준 일용할 예술을 기억하자
사계절이 지나고. 떠나간 사람과 지역경제 대신 시국과 후크송만 돌고 돌았지만, 작은 기적처럼 지금 나는 괜찮다. 정말 괜찮다.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밥상 차리는 사람 따로, 곶감 달란 사람 따로인 세상에서 그래도 아직은 먹고살고 영화 비슷한 걸 만든다. 다만 이제 틈새상품이라도 되고 싶어진 내게 SNS마저 인정투쟁의 연장. 트위터를 하던 중, 노래로만 아는 달빛요정 이진원씨가 자취방에서 쓰러졌다는 뉴스를 접했다. 통상의 조의를 표하고 의무적으로 세상에 대한 일갈을 남기려다 문득 한받씨를 떠올렸다(불길하게도). 그는 어떤 양분으로 버티고 있을까. 나는 그에게 조금의 양분이라도 된 적이 있을까. 한받씨는 그간 내 작업의 분명한 영양소였는데, 최소한 비타민C였는데, 곡식의 씨였는데.
그렇게 우리에게 일용할 예술을 제공해준 분들과 분한 작별을 했을 때, 이를 더 나은 시스템을 고민하는 계기로 전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웃들도 다는 모를 내 무수한 길목의 동무로 기억하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고유한 개인으로 먼저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 만약 내가 셋방에서 쓰러지더라도 시장이 외면한 1인 정도로 급히 요약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며칠 전 한받씨로부터 온 문자. “한받입니다. 11월11일 오후 2시30분경에 3.29kg 건강한 남아를 아내가 순산했어요.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아니요, 한받씨, 제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