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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완성으로서 미완성

‘논 피니토’와 열린 예술

<미완성 교향곡>(1822)이라 불리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첫 두 악장만 풀 스코어로 존재하고, 3악장(스케르초)은 9마디의 오케스트레이션과 13마디의 피아노 파트만 남아 있다. 마지막 4악장은 아예 시작도 못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곡을 쓰고도 6년을 더 살았으니, 적어도 시간이 없어 완성을 못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가 하면 이 곡이 정말 미완성인지 의심하는 음모론도 있다. 슈베르트에게 곡을 넘겨받은 이가 오랫동안 곡을 공개하지 않았고 악보의 페이지도 찢겨나간 것으로 보아 어쩌면 슈베르트가 이 곡을 완성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곡의 완성태를 제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영국의 어느 음악학자는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슈베르트의 다른 곡을 끌어다 피날레를 대신하는 시도를 했고, 러시아의 어느 작곡가는 스케치로만 남은 스케르초 부분을 보완하고 피날레 부분은 아예 새로 작곡하기도 했다. 이런 시도는 학문적으로는 흥미로울지 모르나, 예술적으로는 부질없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음악사에 미완성으로 남은 곡이 한둘이 아닌데 왜 이 작품만 <미완성 교향곡>이라 불리냐는 것. 슈베르트가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아도 적어도 후세인들은 이 작품을 미완성 상태 그대로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논 피니토’, 의도적 미완성

미완성작이 지닌 묘한 매력에 제일 처음 주목한 이는 플리니우스(AD 23~79)다. 이 로마의 저자는 “미완성 작품을 보면 우리는 슬퍼지는데, 이는 미완성 작품이 우리에게 저자의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미완성 작품이 예술적 묘비명이 된 경우도 있다. 바흐의 걸작 <푸가의 기법>(1751)의 마지막 곡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 곡은 239번째 마디에 B♭-A-C-B♮의 네 음(독일 표기법으로는 B-A-C-H)과 더불어 갑자기 멈춘다. 원본 악보에는 바흐 아들의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다. “작곡자가 BACH라는 이름을 도입하는 지점에서 작곡자는 죽었다.”

작품을 의도적으로 ‘미완성’으로 남기는 기법을 흔히 ‘논 피니토’(non finito)라 부른다. ‘논 피니토’라고 하면 당장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떠오를 거다. 특히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장식하기로 되어 있었던 노예 연작. 하지만 노예 연작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작품, 즉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죽어가는 노예>와 <반항하는 노예>는 말이 ‘논 피니토’지, 실은 완성작에 가깝다. 본격적인 논 피니토를 보려면 피렌체의 ‘갈레리아 델 아카데미아’에 가야 한다. 막 대리석을 찢고 밖으로 나오려 몸부림치는 미완의 형상들이 내게는 그 유명한 <다비드>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논 피니토 기법은 미켈란젤로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 이전에 도나텔로가 파두아의 청동상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바 있다. 하지만 도나텔로는 미완성을 의도한 게 아니라 계약조건에 불만을 품고 작업을 포기한 쪽에 가까웠다고 한다. 다빈치 역시 수많은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놓았다. 그의 관심사가 워낙 방대하여 한 프로젝트에 오래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르네상스 논 피니토는 중세의 미완성작과는 달랐다. 중세의 미완성이 주로 (재정문제와 같은) 외적 요인의 결과였다면 르네상스의 미완성작은 종종 (창작의 고뇌와 같은) 내적 갈등의 소산이었다.

미완성작이 예술가의 내적 갈등의 결과로 빚어진 경우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두개의 구별되는 단계가 존재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1)작가가 그저 창작의 한계에 부딪혀 작품을 미완성으로 방치하는 것과 (2)미완성의 상태 그 자체를 또 다른 완성으로 제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르네상스의 다른 작가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미켈란젤로는 확실히 첫째 단계를 넘어서 둘째 단계까지 나아가려 했던 것 같다. 후기로 갈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은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놓곤 했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의도가 논 피니토를 만드는 데 있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논 피니토는 르네상스의 지성계를 휩쓸었던 신플라톤주의와 관련이 있다. 플라톤이 실재(현실계)와 이데아(이상계)를 분리해놓았다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두 세계가 가장 어두운 물질에서 가장 밝은 정신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스펙트럼을 이룬다. 여기서 인간은 물질의 옷을 벗고 육체를 정화하여 정신으로 상승하는 존재. 미켈란젤로는 이 신플라톤주의 존재미학을 창작의 원리로 삼아, 조각이란 물질(석재)에서 출발하여 정신(형상)으로 상승하는 과정이라 여겼다. 그의 논 피니토는 물질에서 정신으로 상승하는 이 고투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함이었으리라.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이해했다. 당시의 일반적 방식은 먼저 점토로 원하는 형상의 미니어처를 만든 뒤 이를 대리석에 전사하는 것. 하지만 이 경우 형상과 재료는 분리되기 마련이다. 미켈란젤로는 이와 달리 곧바로 대리석에 손을 대어 깎아 들어갔다. 신플라톤주의의 가르침에 따라, ‘형상이란 재료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재료 그 속에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각은 물질에 갇힌 형상을 해방시키는 작업이다. 카라라의 채석장에서 그는 대리석 덩어리 속에 갇힌 형상들이 꺼내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었을 거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간주했다. ‘갈레리아 델 아카데미아’의 논 피니토들은 반쯤은 거대하고 육중한 돌덩이 속에 갇혀 있다. 육중한 재료를 뚫고 밖으로 나오는 형상들의 고통. 그 고투의 순간을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노예들은 동시에 육체와 싸우는 인간 영혼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저 손작업(실행)의 결과가 정신의 작업(관념)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작업을 중단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플라톤주의의 신학 및 미학과 완벽하게 합치한다는 점에서, 그의 논 피니토는 예술적으로 의도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열린 텍스트로서 논 피니토

미술사가들이 논 피니토에 열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완성작은 완전범죄처럼 범행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린다. 하지만 논 피니토에는 정과 망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 위대한 범죄(?)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논 피니토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비록 르네상스의 발명품이나 ‘논 피니토’의 발상 자체는 매우 현대적이다. 현대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시한다는 것. 가령 작품보다 그리는 행위를 더 강조했던 잭슨 폴록을 생각해보라. 의도된 논 피니토는 이 ‘과정으로서의 창작’, ‘생성으로서의 작품’의 탁월한 예가 된다.

고전주의 미학은 예술에 데카르트적 명료함을 요구했다. 작품 속의 모든 것이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명석·판명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낭만주의 이후 외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애매모호한 것이 예술언어의 특성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논 피니토는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열린 예술작품’의 고전적 예가 된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미완성작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이 완성됐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게 만든다”. 물론 보는 이마다 그 모습을 다르게 상상할 것이다. 논 피니토는 이렇게 관찰자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과정이자 생성으로서 삶을 이어간다.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