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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갈수록 깊어지는 그의 영화언어에 경배를

부산영화제에서 본 신작 <두만강>을 장률 감독의 최고작으로 꼽은 이유

<두만강>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장률 감독의 신작 <두만강>이 좀더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이 영화는 장률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작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 영화 가운데서도 걸작 수준에 올라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장률의 영화언어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스토리의 예정된 인과성을 비집고 삐죽삐죽 솟아나는 감정의 기세가 강렬해서 영화의 대단원에 이르면 거의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장률의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스타일은 늘 그렇듯이 담담한 외형을 지키지만 내적 리듬의 격렬함은 그 자신의 어느 영화보다 거세다.

<두만강>은 두만강 어귀에서 북조선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중국의 어느 조선족 동포 마을이 배경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이 마을에 북조선 사람들이 강을 넘어 탈북해 들어온다. 북조선 탈북자들에게 처음엔 동포로서 호의적이었던 중국 조선족 마을 사람들은 탈북자들이 자신들의 먹을 것을 훔치고 이런저런 해코지를 본의 아니게 저지르자 이윽고 그들을 꺼리고 혐오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남한에 돈 벌러간 채 할아버지와 벙어리 누나 순희와 함께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 창호는 북조선과 중국을 수시로 넘나드는 정진이란 북조선 소년과 친구가 된다. 그들의 우정도 어른들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겪는다.

화면 안과 바깥의 조응과 길항의 연출 방식

간단한 스토리지만 간단하지 않은 것을 담고 있다. 신문 사회면 단신에 나올 법한, 또는 텔레비전 휴먼다큐에 나올 법한 스토리인데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다 여러 입체적 정황을 암시적으로 배치해놓았다. 조선족 아이들이 늘 눈 내리는 마을 어귀 공터에서 중국 공안과 공차기 놀이를 하고, 치매에 걸린 마을 이장 어머니는 늘 강을 건너려 하고, 명태 등을 수송해 파는 마을 상점 아저씨는 트럭에 몰래 북조선 탈북자를 숨겨 들어오고 하는 따위의 정황들이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창호와 정진 두 소년의 우정이 점진적으로 발전해가는 것이 보인다. 처음엔 못 사는 데서 왔다고 은근히 정진을 괄시하던 창호는 정진이 축구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곧 닥칠 건넛마을 아이들과의 축구경기에서 정진이 함께 뛰어주면 좋겠다고, 이를테면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 정진이 병을 앓는 어린 누이동생에게 먹을 것을 구해주러 도강한다는 걸 안 다음부터 창호는 정진에게 더 잘해주는데 상황은 이들의 우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느 날 밤 늦게 한 탈북자 남자가 창호 집을 찾아와 하룻밤만 창고에서 재워줄 것을 청한다. 이튿날 창호와 할아버지가 시내로 간 사이 탈북자 남자는 자기에게 먹을 것을 준 순희에게 처음엔 엎드려 절하며 감사를 표하지만 배가 부르고 여전히 먹을 것이 상에 남아 있자 은근히 술을 청한다. “술 한잔 먹었으면 딱 좋갔는데….” 순희가 꺼내준 술병을 그 남자가 급히 거듭 들이켤 때 순희는 텔레비전을 켜고 화면에는 김정일을 찬양하는 관제방송이 흘러나온다. 취기가 얼굴에 불콰한 탈북자는 그 화면을 보고 잠깐 경기를 일으키고 순희에게 먹잇감을 찾은 승냥이의 표정으로 대든다. 이 부분은 <두만강>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면이다. 다른 관객도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 동시에 그 예감이 실제로 적중한다면 이 영화에 실망할 것이란 느낌 때문에 조마조마했다. 그런 일이 왕왕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라 해도 이 영화에서 극적 파장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사건이 벌어진다면 뭔가 인위적인 감독의 개입 흔적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고 이는 하수의 방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상대로 탈북자가 천사의 성품을 지닌 순희, 말 못하는 순희에게 못할 일을 저지르는데도 영화의 극적 조율방식에 정이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 카메라는 앞서 말한 텔레비전 화면을 비추고 있고 뭔가 끔찍한 일은 화면 바깥에서 벌어진다. 순희의 비명소리, 헐떡이는 남자의 소리가 김정일 찬양방송의 사운드와 겹치면서 감정적으로 증폭되고 화면이 커트되면 남자는 집에서 나와 허겁지겁 도망치고 그 광경을 창호의 마을 친구인 철부가 몰래 훔쳐보고 있다.

<두만강>에서 장률은 이전의 영화에 비해 훨씬 입체적인 방식으로 화면 안에 담긴 것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화면 밖을 보여주는 것에도 상당한 암시의 너비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물들이 화면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지속되는 어떤 상황의 묘사가 화면 안과 바깥의 변증법 속에서 길항관계를 이루며 조응하는 패턴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앞서 조마조마했던 상황이 극적 강조를 넘어 파탄으로 치닫지 않은 것도 이같은 묘사방식 덕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바깥으로도 확장되어 계속될 거라는 관객의 인식이 장률의 연출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면서 우리는 스토리 전개보다는 화면 안과 바깥의 상황에 더 예민해지고 그것들이 이루는 보이지 않는 띠에 반응하게 된다. 이런 것을 장률이 새로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로베르 브레송과 같은 서구 감독이 이미 성취한 미니멀리즘의 변증법을 따라하거나 계승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뭐랄까, 다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너무 가슴이 아플 만큼 현실의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끌어안으려고 하는 감독의 예술적 포용력의 깊이를 이 화면 안과 바깥을 아우르는 스타일이 대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많은 아우성과 슬픔과 분노를 눌러 담은 영화

영화 후반에 이르면 정말로 관객도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화면 속 인물들의 담담한 행동과 달리 파도처럼 밀려든다. 친구 철부에게 누나 순희가 탈북자에게 강간당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그리고 순희가 그 일로 임신한 것을 안 뒤, 창호는 마을 아이들을 데리고 탈북자들을 린치하러 다닌다. 절친했던 정진과 다른 탈북자 소년들에게도 똑같이 막 대한다. 어느 날 정진이 순희 누나가 차려준 밥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집에 돌아온 창호는 욕을 한다. “야, 임마, 네가 왜 여기서 밥을 먹고 있어?” 정진은 당당하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창호에게도 약속을 지키겠다고 한다. 무슨 약속이냐고 창호가 되묻자 이웃 마을 아이들과 축구경기 할 때 꼭 오겠노라는 약속이라고 정진이 말한다. 먹을 것을 싸주려는 순희 누나에게 정진은 이제 자기 어린 여동생은 죽었으니 그것은 필요없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설명하는 것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에게 실례다. 더이상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가 예상했더라도 차마 응시하지 못할 대단원의 파국이 펼쳐진다. 그건 앞서 말했던 화면 안과 바깥의 조응과 길항을 엮는 최고조의 장률 연출이 펼쳐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평론가로서 이렇게 쓰는 것이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두만강>의 절정부에서 울고 싶은데 울 수 없는, 꺽꺽대고 목에서 막히는 슬픔을 느꼈다. 거의 참을 수 없는 폐소공포증을 느꼈다. 등장인물들의 삶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포괄하는 이 땅의 비극에 대해 갖는 공포였다. 그 어떤 정치가나 예술가가 이토록 비통한 슬픔을 보여줬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 어떤 영화가 이렇게 격조있게 동포들의 삶의 불행을 보여줬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여기서 그 격이란 것은, 화면 안에서 물리적으로 컷을 계산해 붙여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영화에서 다섯개의 컷이 필요하다면 한두개의 컷으로도 보여주는 게 가능한 시와 비슷한 것이라고 느껴진다. 표현할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수가 적어지는 상황처럼, <두만강>의 화면은 과묵함 뒤에 수많은 아우성과 슬픔과 분노를 눌러 담고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눈 내리는 두만강 다리를 걸어가는 치매에 걸린 노파의 이미지가 길게 보인다. 이 이미지는 강렬한 상징을 넘어선 근원적인 비극성을 품고 있다.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장률 감독의 예술적 자아에 그저 경의를 표하고 싶을 따름이다. <두만강>은 올해 가장 푸대접받은 걸작이며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게 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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