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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내가 사랑하는 왕가위의 1분
김혜리 2010-11-05

아녜스 바르다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종로의 서울아트시네마.

10월15일

부산영화제 폐막. 해운대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김해공항으로 향한다. 홀로 여행하는 동안만큼 내 몸과 마음이 진정 그리워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그들이 내게 어떤 종류의 온기와 향기를 주는지, 선연하게 의식하는 시간은 달리 없다. 항상 뒤늦게 도착하는 앎. 이 안타까움을 어찌할 것인가. 그들이 내 곁에 부재할 때만이 나는 내 그리움의 또렷한 형상을 아는 것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삶에 충족 따위는 없으며 기다림 아니면 회한의 단속적 연쇄일 뿐임을 수긍하고 나면, 덜컹이는 버스에서, 출렁이는 비행기 안에서 응석 피우는 어린애처럼 소망하게 된다. 그냥 이대로,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은 채 영원히 이 여행을 계속하면 안되는 것일까? 우리는 어차피 언제나 이동하고 있을 따름 아닌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 행하는 모든 행위는 약속이거나 사과이거나, 혹은 재차 다짐하는 약속에 불과하다. 예컨대 예쁜 문방구를 사는 행위는 이거라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소망의 피력이고, 밥을 챙겨 먹는 건 다음 끼니까지 힘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고, 친구나 애인과 나누는 포옹은 다음엔 정말 너에게 잘하겠다는 맹세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떠한가. 예술 역시 그 자체로 세상을 개선하지 않는다. 예술의 참된 기능은 다만, 우리가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태도를 유지하도록 붙들어주는 데에 있다. 소설 <1Q84>에서 아오마메가 말한 대로 내 존재의 심지에는 사랑이 있으므로 괜찮다고 우리가 되뇔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 또한 반성이며 다짐이다. 아니, 그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내가 왕가위를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 그는 ‘현재’를 살기 불가능한 인간의 숙명적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의 영화는 예외없이 사랑하기에는 너무 이르거나 늦어버린 시간을 보여준다. <아비정전>에서 장국영과 장만옥이 나눈 1분은 기억이 소멸하는 ‘날짜변경선’이며, 왕가위의 이후 영화는 기본적으로 그 1분을 향하는 영겁회귀다. <2046>에 등장하는 특급열차는 그래서 내게, 왕가위 영화의 축도로 보인다. 이 기차는 상실한 기억을 붙잡을 수 있다는 2046년의 미래로 승객을 데려다준다. 그러나 2046년에 갔다가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열차의 안드로이드 승무원들은 슬픔을 느낄 감정적 능력이 있지만, 그들의 눈물은 하루 뒤에야 차오른다. 인간이 당면한 존재 조건이 무릇 이와 유사하다면 우리가 왜 영화에 매혹되는지 답이 보인다. 움직이는 영화의 모든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기억인 동시에 예언이 된다. 즉, 매일 아침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우리가 당면하는 인간과 시간 사이의 모순이다. 마침 서울에서 회고전이 열리는 아네스 바르다 감독의 1984년 글을 인용해보자. “모든 사진은 움직임을 고정하고 결국은 움직임을 거절한다. 사진에서 운동은 허깨비다. (반면) 모든 영화에는 삶의 운동을 포착하려는 욕망, 고정됨을 거절하려는 욕망이 깃들어 있다. (중략) 시네마와 포토그래피는 서로에게 헛되이 작용한다. 내 생각에 시네마와 포토그래피는 근친상간을 나눈 다음 적이 된 남매와 비슷하다.”

10월17일

멕시코 감독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침묵의 빛>을 마침내 스크린에서 보다. 영화 상영에 앞서 고막에 테러를 가하는 대한극장의 돌비사운드 시범 영상과 더불어, 서울아트시네마의 화재시 행동요령 영상은 항상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소형 화염방사기(?) 같은 기구가 등장하는데, 불을 끄겠다는 건지 내겠다는 건지 의도가 아리송해 번번이 웃음이 새나온다. 하지만 엄숙한 아트시네마 관객은 아무도 웃지 않는다. 머쓱하다.

<침묵의 빛>(Stellet Licht)은 영미 평단에서 논제로 다루어졌던 ‘슬로 시네마’의 표본이다. 벨라 타르, 지아장커, 차이밍량,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알렉산더 소쿠로프 같은 작가들의 영화에 붙여진 ‘슬로 시네마’라는 개념을 가리켜, 영국 비평가 조너선 롬니는 “사건보다 무드와 암시(evocativeness), (덧없는) 시간성을 우선에 놓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슬로 시네마’라는 이름은 한편 엷은 경멸이 서린 명명법이기도 하다. “무조건 느리게만 찍으면 엘리트 평론가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예찬하잖아?”라는 조소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 비웃음에 동조하는 일은 너무나 쉽기에 의심쩍다. 영화에서 플롯과 대사가 결핍된 빈자리를 쳐다보지 말고, 대신 새로운 무엇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는가를 감각할 때 슬로 시네마를 비로소 경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로부터 동이 트는 지평선까지 매우 느리게- 실시간 일출을 보고 있는 착각이 들 지경- 카메라가 패닝하는 <침묵의 빛>의 도입부는, 관객에게 지금부터 이 영화의 호흡에 맞춰달라는 단호한 ‘일러두기’다. 관객 중 한 어르신이 시작 5분 무렵에 정직하게 불평했다. “뭐야, 계속 이러는 거여?” 거기 없는 걸 찾지 마시고, 여기 무엇이 있는지를 느껴보시라고 권했다가는, 돌돌 만 팸플릿으로 맞을 것 같다.

<침묵의 빛>은 불륜에 관한 경건한 영화다. 신실한 신앙으로 검소한 전원생활을 영위하는 멕시코 북부의 기독교 메노파(Mennonite) 마을이 영화의 무대인데 이상하게도 극중 어디에도 ‘메노파’에 대한 설명이나 예배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신을 두려워하고 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인물을 통해 이 공동체의 문화를 짐작게 할 뿐이다. 육남매의 아버지인 성실한 농부가 아내 아닌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아내에게 이를 알리고 아버지와 가장 친한 친구에게 충고를 구한다. 삼각관계의 세 남녀는 고통받는 상대방을 가엾게 여긴다. 그들은 증오를 맞부딪치는 대신 일종의 재해를 한자리에서 겪고 있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래도 고통까지 가릴 순 없다. 아내는 털어놓는다. “우리가 사랑했던 시절엔, 당신 옆에서 노래를 부르건 잠을 자건 무엇을 해도 내가 세상의 일부 같았는데 이제는 세상과 단절된 것 같아요.” 이별을 결심하고 마지막 정사를 나눈 직후 내연의 여인은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시간이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가 무심코 닫는 문 너머로 사라지는 남자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는다.

10월18일

김종관 감독은 첫 장편 <조금만 더 가까이> 언론시사 무대에서 ‘작은 영화’임을 강조했다. 여러 커플의 일화를 이어가는 구성 원리를 고려해서도 작은 영화를 자칭했겠지만, 사랑의 일대기를 고스란히 다루지 않고 한 대목만 잘라낸 이야기들의 모음이라는 점에서도 그런 말을 했으리라. <조금만 가까이>에 채록된 연애의 한장(章)은 하나같이 사랑의 클라이맥스를 빗겨난 기슭의 풍경이다. 그들은 이별했으나 한쪽이 마음을 옮기지 못해 질척대거나, 진지한 관계에 진입할까말까 망설이고 있거나, 사랑하지만 섹스는 좋지 않다는 걸 발견하는 커플들이다. 그러니 이 영화의 제목은 ‘충분히 가깝지 않은’이라고 바꿀 수도 있으리라. 충분히 가깝지 않기 때문에 이 순간들은 진실의 일단을 노출시킨다. 영화의 약점도 분명해 보인다. 극중 인물들이 일률적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지나칠 정도로 귀히 여기고 있다는 점, 그리고 몇몇 느리고 긴 테이크를 지탱시키는 장력이 떨어져 배우보다 카메라가 오래 버티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

10월19일

사랑에 관해 참으로 많은 대화를 주고받는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를 보고나니 언젠가부터 사람들과 어울린 자리에서 사랑이 화제로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때는 그리 가깝지 않은 상대를 만나도 시간이 흐르면 인류의 공통 화제인 양 사랑- 연애나 편력과는 조금 다른- 에 관한 이야기로 미끄러지곤 했는데, 이제 그 자리에는 재미와 건강, 안정이 오른다. 운 좋은 소수를 제외하면, 내 또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 없어도 무탈하게 살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그저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기타 등등’을 매우 열심히 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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