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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혹시 구매하고 싶어? 연락해!
윤성호(영화감독) 2010-11-05

나의 영화 아이템들의 릴레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할 말이 없는 날. 쓸 글이 없는 주. 익명들에게 발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순간. 이번주가 그렇다. 아니 실은 이미 여러 번 그런 순간이 있었는데 이전에 다른 용도로 써놓은 문단들을 어찌어찌 재활용하거나, 긴요한 마무리가 없이도 지면을 메울 수 있는 잡상들을 별다른 정리없이 ‘요새 사정이 있으니 이 덤핑 패키지라도 받아주세요’ 내밀며 버텼다(그러면 편집을 담당하는 심은하 기자님이 그럴듯한 제목을 달아주면서 나름의 기획상품으로 포장을 잘해주신다, 언제나 고맙고 죄송하다).

그래서 조금 뜬금없이 소개해보는 ‘구상은 해봤지만 실제로 만든 적은 없는, 만들지 않아서 다행인, 그리고 웬만하면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 영화 아이템들의 릴레이(이런 날을 위해 비축해온 빨간 보자기 파란 보자기), 나의 가련하고 의젓한 모티브들의 난전. 일련번호는 저 잡념들의 탄생 순서. 혹시라도 구매의사 있는 분은(싸다, 싸!) 댓글이나 메시지로 연락 부탁.

2.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을 할리우드식으로 번안한, 오드리 헵번 출연에 조지 쿠거 연출의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를 다시 지금 서울 버전으로 번안하면 어떨까. 원작은, 저명한 언어학자가 거리에서 꽃을 강매하는 빈민 여성을 섭외, 발성과 딕션 강좌를 통해 귀족 코스프레를 시키다 진짜 사랑에 빠지는 설정이니까, 한국판에서 여주인공의 직업은 종로에서 전병 파는 십대 여성, 남자는 변증법을 믿는 팝 칼럼니스트, 둘이 도전하는 과제는 지상파 아나운서 합격. 계급 상승에 성공한 여인은 동포 2세 사업가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어느새 그녀를 애착하게 된 자신을 인정할 수 없던 팝 칼럼니스트는 결국 <연예가중계>를 통해 열폭. 아, 사랑은 결국 화용론.

3. 고대부터 송의 멸망까지를 다룬 중국 역사서 <십팔사략>을 보면 역사는 나선형이고 영웅들의 이합집산에는 패턴이 있다. 그걸 21세기 말 한국 버전으로 그리면 어떨까. USA는 동북과 서남으로 나뉘어서 내전 중이고, 서남아메리카가 일본과 협조하여 한반도를 간접 지배하는 형국. 경기도에서 농구나 하며 한가로이 지내다 이에 대항하게 되는 떠꺼머리 주인공과 그를 따르는 ‘장정’들의 일대기. 제목은 ‘슬램 더 십팔사략’. *상업영화감은 아니다 싶으면 한자 학습용 비디오나 체육 교재로도 괜찮을 듯.

9. 정치적으로 올바른 연애를 위한 민속지 동영상 천국. 살면서 만나는 ‘예쁘고 똑똑한’ 여자분들과 꾸준한 대화를 통해 ‘자기가 아름답고 매력있는데다 영리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확실하게 인지하고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도 솔직히 물어보고 ‘그런 자신에게 남자들이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디밀어대는 호감과 구애의 심상들을 어떻게 접수하고 감당하고 활용하는지’도 체크한다. 대화의 중간쯤에는 ‘나 같은 사람한테도 성적인 관심이나 매력을 느끼는지’도 물어보는 야심찬 기획. 비주얼과 흐름은 일본쪽 야동 문법을 패러디. 스킨십이 아닌 대화를 나누는 차이.

10. 조선 중기, 상공업이 슬슬 발달하던 차, 중인계급 청년의 사랑과 입신양명 이야기를 루시 몽고메리와 우디 앨런을 반반 믹스한 스타일로….

15. 공공질서를 훼방하는 사람들이 실은 각자 숭고한 미션이 있어서 그 행동을 하는 거란 설정. 가령 한밤중에 찾아온 외계인이 ‘네가 누군가의 시선을 항상 받고 있지 않으면 지구를 인수분해해버리겠다’라며 위협을 했기에, 울며 겨자먹기의 소명의식으로, 마치 타르코프스키 영화에서 촛불 옮기던 아저씨처럼, 지하철 등지에서 민폐를 가장하고 있었던 것. 그러니까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외치는 할아버지 등등은 실은 다들 지구를 지키는 용사들. 그렇다면 최근 화제가 됐던 지하철 난투극도 알고 보면 이 행성의 사활을 건 비장한 전투, CD 행상분들이 틀어놓는 패티 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는 은하계를 위한 송가. *이 내용을 그래픽 노블로도 만들어 역수출.

17. 저수지의 노인들-70년대 조국 근대화를 위한 경제계발5개년계획에 발맞춰, 지독한 환경의 공장에서 열악한 일당을 받으며 근무했던, 그리고 지금은 돈의동 쪽방촌에 모여사는 노인들이, 당시 공장장이던, 그리고 현재 재테크에 성공해 평창동 같은 데서 호젓하게 커피드립이나 하고 있는 부르주아 노인네를 납치하는 얘기. 이발사로 소일하는 멤버가, 설운도나 주현미 노래를 크게 틀어놓은 채 부자노인을 묶어놓고 면도날 쇼를 하는 장면이 영화의 훅(hook). 그러나 내부 성원 중에 그 부자노인을 사랑한 감성노인이 있었고 상황은 파국으로. *과거 쎄시봉 멤버들이 출연해주면 흥행은 따놓은 당상.

20. 가상역사 대한민국. 일종의 평행우주물. 이미 남북통일이 됐는데 공산주의식으로 됐다든지, 그래서 수령님이 통치하는 험한 세상, 아이폰이나 미스에이도 없고… 지금 이곳의 우익인사들이 이 평행우주에서도 여전히 권력에 기생(오옷!), 지금 여기의 진보논객이 거기서도 역시 반체제 인사라는 설정(아하~). 그렇다면 수령님 역할은 여기의 재벌 회장 닮은 분으로 캐스팅. *단, 비슷함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림의 효과는 절감된다.

25. 시위하다 채증당한 뒤 겁이 나서 지방으로 도망간 지식인 사내들. ‘지방’ 2음절이 주는 묘한 흥분에 젖어 헌팅에 골몰. *척 봐도 단관 개봉 예술영화 아이템이라 폴더에서 삭제 직전.

26. 오랜만에 원룸에서 투룸으로 이사를 간 뒤, 바뀐 환경에 잠을 못 이룬 채 말똥말똥 상념에 젖은 남자. 안타깝게도 섹스까지는 가지 못한 여자들에 관한 기억을 쭉 머릿속으로 복기하는 식의 옴니버스 구성. *잘만 만들면 선댄스는 우리의 것.

27. 인디 가수면서 에세이도 쓰는 ‘폴’이라는 로맨틱한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여학생. 근데 정작 자꾸 마주치는 건 ‘밥’이라는 너저분한 아티스트. 뭔가 ‘폴’에 비해 많이 모자라고 낭만도 없지만 자꾸 보다보니 정분이 싹트고, 결국 ‘밥’을 홍대 남신으로 만들기까지 이 여학생의 역정을 어쿠스틱하고 언플러그드하고 88만원 세대 돋는 스타일로-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린다. 여기에 아련 돋는 DSLR 카메라는 옵션 아닌 필수. 트랄랄라~.

39. 원래는 하천문제에 대해 페디큐어만큼의 관심도 없었으나 그냥 얼굴마담 격의 환경홍보대사가 된 뒤 기이할 정도로 그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하는, 그래서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는, 그러다 정치권과 진짜 불편한 상황까지 치닫는, 여자 탤런트 이야기. 바다도 나올 테니까 제목은 ‘해물’(海物)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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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