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가까이>는 김종관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사랑의 상처를 다섯 커플의 에피소드에 담아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어낸 이 영화는 그동안 사랑의 여러 얼굴을 단편으로 실험해왔던 김종관 감독의 행보에서 크게 벗어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확신은 금물이다. 이 영화는 그동안 김종관 감독이 <드라이버> <기다린다> 등의 단편에서 언뜻언뜻 내비쳤던 날것의 느낌을 좀더 선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가슴을 부둥켜안고 힘겹게 마음을 진정하던 연인은 눈에 독기를 품고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짝사랑하는 ‘그’의 주위를 맴돌던 소녀는 그에게 용기있게 다가가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조금만 더 가까이>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김종관 감독의 확장되어가는 영화세계를 목격할 수 있는 기회다.
-첫 장편이지만 옴니버스 느낌의 영화라 단편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도 들고, 많이 낯설지 않았다. 어떻게 만들게 됐나. =다른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잘 안됐다. 그때 KT&G에서 1억원을 지원해주고 영화를 만들어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예전에 윤성호 감독의 <은하해방전선>도 그 프로젝트로 제작했다. 1억원으로 일반적인 장편을 만들기엔 힘든 게 있고, 나는 단편 작업에서 누적되어 있는 것들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몇 십회 차를 신세지면서 영화를 진행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우리 영화가 16회차 만에 완성된 장편인데, 그 안에 완성하려면 옴니버스식 구성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간담회에서 ‘좋아하는 공간에 가을을 담아보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설명했다. =에릭 로메르의 <파리의 랑데부> 같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도시와 계절에 대한 묘사가 한데 어우러지는. 단편영화를 만들다보니 내가 즐겨 다니는 공간을 찍을 일이 많았고, 그러다 공간 활용에 대한 애정이 생긴 것 같다. 이제는 어디 좋은 곳을 가면 ‘여기서 영화 한번 찍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이 먼저 드는 거다.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남산은 서울예대 시절 친구들과 함께 종종 놀러다녔던 곳이고, 로테르담은 내가 여행 갔던 곳, 1974 way home은 좋아하던 카페인데 지금은 없어졌더라. 그렇게 내가 다니던 공간들을 그 모습 그대로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요조와 윤희석의 공연장면으로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열고 닫는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음악을 영화에 끌어온 건 처음이다. =이렇게 작은 규모의 영화를 만들 때는 새로운 걸 시도하면서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언젠가 공연장면을 넣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게 이번 영화가 된 거고. 삼청동의 재즈스토리 아나? 지금은 대학로로 옮겼는데 거기서 라이브 공연을 보면서 그곳의 공연을 닮은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고, 스타일이 다른 사람들이 세션으로 묶여 연주하고. 이렇게 공연하는 장면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던 것 같다. 그전엔 다섯 가지 에피소드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만 있었는데, 공연장면을 생각하니 이들을 한데 묶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다.
-영화를 위해 요조가 김태성 음악감독(<시라노; 연애조작단>)과 함께 음악을 직접 작곡했다고 하던데. 어떤 음악을 주문했나. =처음엔 설레면서도 서글픈 느낌이 드는 멜로디로 가다가 끝나는 부분에선 밝아지는 음악을 원했다. 우리 영화가 그런 영화니까.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그걸 음악이 위로해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음악작업을 할 때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은 건 나도 처음이다. 내가 말한 영화의 뉘앙스를 토대로 음악감독이 전체적으로 구성하고 요조가 멜로디를 만드는 작업이 재미있더라. 그래서 다음에 음악영화를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놀란 건 영화의 수위가 높아졌다는 거다. 게이와 여자 후배의 첫 경험 에피소드에선 사정하는 장면이 나오고, 나머지 에피소드에서도 성적인 농담이나 거친 대사들이 나온다. 보통 김종관 영화 하면 말랑말랑하고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나. =머릿속에서 구상한 이야기는 그렇게 높은 수위가 아니었는데, 시나리오를 보고 다들 세다고 얘기하더라. 그래서 첫 경험 에피소드의 경우 여배우 찾기가 참 힘들었다. 한달 동안 세트를 지어놓고 영화를 못 찍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런 부분도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습들이다. 내가 영화에서 성적인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나는 무척 야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웃음) 사람이 연애를 하면서 성적인 욕망 때문에 무언가를 빼앗기고 또 무언가를 얻는 과정이 생기잖나.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성적인 설렘이나 긴장감을 관찰하는. 나는 어떻게 보면 이 에피소드가 <폴라로이드 작동법>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야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야한가?
-야하다. (웃음) =그렇다면 성공한 거고. (웃음) 사실 첫 장편 데뷔작으로 3년 동안 준비하던 작품도 수위가 상당히 셌다. <소년>이라는 작품이었는데 도시에서 어린아이가 하루 동안 세명을 죽이고 시골 마을로 도망쳐 겪는 이야기를 다룬 거다. 매우 하드보일드한 소재였지만 후반부에서 이야기를 지르지 않고 멈춰버려서 상업성이 떨어진다고들 하더라. (웃음) 어쨌든 그렇게 센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은 항상 있는 것 같다.
-제목은 왜 <조금만 더 가까이>라고 지었나. =가까워지려는 마음이 있지만 가까워지지 않고, 뭔가 닿지 않는 그런 관계들에 대한 얘기니 반어적인 느낌의 제목을 붙여봤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제목 때문에 더 애틋한 느낌이 있지 않을까. 보통 제목이란 게 영화를 보기 전에 기대감을 갖게 해야 하는 건데. (웃음)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여운을 주는 느낌의 제목을 생각해본 것 같다.
-다섯 에피소드의 색깔이 모두 다르고, 배우들의 느낌이나 정서도 겹치는 지점이 없다. 단편영화 다섯편 찍는 기분이 들었을 것도 같다. =16회차 만에 다섯 현장을 연달아서 찍으려니 정말 그런 기분이 들더라. 이번 영화 현장에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는 게 그런 부분이다. 다이얼로그의 패턴과 내용도 에피소드마다 다르고, 대사를 치고받는 뉘앙스나 배우들의 성향도 다 달라서 이야기별로 배우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다르게 했거든. 게이 커플 에피소드의 경우 철저하게 계획된 상태에서 서로 충돌하는 과정을 담아냈고 요조, 윤희석의 남산 촬영 장면은 비교적 즉흥적으로 유연하게 찍었다.
-<연인들>(김종관의 단편영화 11편을 묶은 옴니버스 멜로)이 개봉할 때 전체적인 정서를 고려해 작품의 배열을 고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 작품도 다섯 에피소드의 순서를 고민했을 것 같다. =위치에 대한 고민이 계속 있었다. 시나리오상에서는 상처에 대한 얘기들을 하다가 마지막에 첫 경험의 설렘에 대한 이야기로 방점을 찍으려고 했는데, 첫 경험 에피소드에서 여자와 처음으로 섹스하는 게이 캐릭터가 그 이전 에피소드에서 이별을 겪기 때문에, 설렘보다 아픔이 더 크게 다가오더라. 나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마무리는 기분 좋게 끝냈으면 했다. 어그러지고 못난 모습들을 보여주다가도 그래도 괜찮아 하며 다독이는 영화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첫 경험 에피소드를 전반부로 끌어왔다.
-장편으로 더 길게 늘려보고 싶은 에피소드는 없었나. =이전에 준비하던 장편 멜로 시나리오가 <조금만 더 가까이>의 윤계상, 정유미 커플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이별여행을 가서 남자는 어떻게든 여자를 떨쳐내려 하고 여자는 어떻게든 잘해보려 하는. 제목이 <날 놓아주세요> 였는데. (웃음) 어떻게 보면 그 시나리오 안에 이번 영화의 다섯 가지 에피소드의 느낌이 다 들어 있었다. 장편으로 만들려다가 이 영화를 찍게 됐는데, 그 이야기를 다섯개로 조각조각낸 게 <조금만 더 가까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그녀(정유미)와 다시 만난 소감은 어떤가. =너무 좋았지. 이건 농담인데, 옛날엔 유미에게 내가 너무 어려운 선배였다면 이젠 나에게 유미가 어렵다. (웃음) 예전엔 유미가 좋은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엔 내가 좋은 배우와 작업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연기에 대한 흡입력이 대단하다. 리허설도 대충하고, 리딩만 한번 했는데 정말 잘하더라.
-수줍게 선배를 짝사랑하던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정유미에게 옛 애인을 스토킹하는 역할을 준 건 의도적이었나. =꼭 그런 건 아니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한번 같이 해봤으니, 배우의 영역을 알잖나.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처음부터 유미를 염두에 두고 쓴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녀라면 잘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맡겼다. 유미는 앞으로 좋은 멜로영화를 많이 할 수 있겠다 싶다. 귀여운 얼굴이지만 눈매가 깊어서, 30대 배우가 되면 또 다른 느낌을 줄 것 같다.
-그동안 왜 장편을 안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스스로는 치열하게 살았는데, 남들에 비해 내가 좀 느린 속도로 가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나도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긴 한데, 그건 여러 가지 사정이 맞아떨어져야 들어가는 거고. 나는 평생 영화를 만들 사람이라 한편 만들고 영화 인생 끝낼 것처럼 일희일비하고 싶진 않다. 항상 다음을 생각하고, 한편 찍을 때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계속 발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번 영화 만들 때도 사람들이 좀더 일반적인 장편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고, 나도 어느 정도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멀리 보면 지금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 것 같다. 언젠가는 단편을 찍어도 쟤가 또 단편 찍었어? 작은 영화 찍었어? 할 게 아니라, 김종관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다음엔 어떤 영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지금은 내 영화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작은 영화를 할 때는 보여주는 창구가 작으니 보는 사람만 보게 되잖나. 영화 작업이 친구찾기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스스로 발전하는 것도 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계속 사귀어야 하니까. 좀더 일반적인 서사의 이야기로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다.
-아까 인터뷰 장소에 오면서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뭔가. =이건 개인적인 건데, 중요한 걸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다시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내가 돌아갈 집이 없다는 느낌? 익숙하기 때문에 아늑한 그런 느낌을 잃어버린 것 같다. 물론 찰나찰나 행복할 때가 있고, 그 힘으로 살고 있지만. 아니에요, 전 행복합니다. (웃음) 마무리는 기분 좋게 해야죠. 사진은 활짝 웃는 걸로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