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현인들의 글을 읽다보면 깨달음과 폭소가 동시에 터지곤 한다. <영웅전>으로만 알았던 플루타르코스의 <수다에 관하여>도 그런 글이다. 옛 철학자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지한 유머감각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 책은 짧은 몇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글인 <수다에 관하여>를 비롯해 <분노의 억제에 관하여> <아내에게 주는 위로의 글>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 <소크라테스의 수호신> <결혼에 관한 조언>이 실려 있다. 첫 글 <수다에 관하여>는 이렇게 시작한다. “철학이 수다를 치유하려 한다면 까다롭고 힘든 과제를 떠맡는 셈이다. 수다의 치료약은 말이고, 말은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수다쟁이들은 계속 지껄이느라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침묵하지 못하는 상태가 듣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수다쟁이들이 걸린 병의 첫 징후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수다의 해악에 관한 통찰력있는 말이 이어지는데, 수다의 해악을 플루타르코스 선생은 이렇게 비유한다. “성행위가 너무 잦은 이의 씨가 생식 능력이 떨어지듯 수다쟁이의 말은 불완전하고 결실을 맺지 못하는 법이다.” (뭐래니?) 게다가 목숨을 걸고 고객의 비밀을 지킨 창녀의 이야기도 소개되는데 그래서 그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사랑한 것이 결코 품위를 해치는 행위가 아니라나. 게다가 진지하게 수다를 치유할 수 있는 방안도 제시한다. 아니 선생, 수다를 치료할 수 있다니요? 토 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글은 <분노의 억제에 관하여>, 가장 감동적인 글은 딸을 잃은 뒤 아내에게 쓴 편지 <아내에게 주는 위로의 글>이고, 가장 황당한 대목이 많은 글은 <결혼에 관한 조언>인데, 토를 달고 싶건 싸우고 싶건 지혜에 감사하고 싶건 촌철살인인 문장이 많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수호신>은 요즘 정치인과 정치평론가들에게 읽히고 싶은 글. 재채기 방향을 두고 소크라테스 수호신이 왔다며 중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누가 내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