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광고음악 작곡가 하비(더스틴 호프먼)는 딸 수잔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런던으로 떠난다. 헤어진 아내 진은 부유하고 사교적인 남자 브라이언과 재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고, 수잔과 예비사위마저 브라이언을 몹시 따르는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회사에선 느닷없이 해고 통지가 날아온다. 공항 카페에 망연자실 앉아 있던 하비는 옆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케이트(에마 톰슨)와 대화를 시작한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중반에 이를 때까지, 가끔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내면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특히 에마 톰슨이 연기하는 영국 여자 케이트는 단연코 빛을 발한다. 에마 톰슨은, 시끌벅적한 대화 도중 말없이 사라지더라도 그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을 외로움과 비참함을 뛰어난 신체언어로 묘사한다. 은근한 멸시 앞에서 속으로 삭이는 모욕감, 그녀는 필사적으로 타인과의 교류에 뛰어들기 위해 어색한 미소를 입에 달고 있거나 홀로 화장실 변기에 앉아 눈가를 꾹꾹 누르며 눈물을 참는다. 케이트의 대사 도중 “감정을 숨긴다는 건 이를 악문다는 뜻”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가족과 직장 양쪽에서 소외당하는 부유한 하비(런던 여행 중에도 메리어트 호텔에서 묵을 정도)보다 케이트에게 더 잘 어울린다. 아무래도 바쁜 승객을 붙들고 설문 조사를 해달라고 졸라야 하는 남루한 일상을 견디는 케이트쪽의 현실성 묘사가 훨씬 빛을 발한다.
보잘것없는 중년의 은근한 로맨스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용감하고 비관습적이라 할 만하지만,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관습적 장치와 해결 방식에 몸을 기댄다. 비관습적인 이야기가 관습적으로 해결될 때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진다는 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