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기억에 관한 영화다. 정확히는 추억에 관한 영화다. 막 죽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골라내는 이야기. 영화의 배경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지대인 림보다. 따지고 보면 저승에 더 가깝지만, 아무튼 영원의 시간 속으로 내던져지기 직전의 기착지다. 이승을 떠난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문다. 그들이 거기서 해야 할 일은 그곳 면접관들과 상담을 하며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골라내는 것이다.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일생을 사는 동안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훨씬 많이 겪을 것이다. 림보의 면접관들은 죽은 사람들이 그 속에 영원히 머물고자 하는 추억을 영상으로 만들어 그것만을 그들의 기억에 주입시킨다. 사람들은 그 좋은 기억만을 안고 영원의 시간 속으로 떠나간다. 죽음이라는 것이 정녕 그런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는 죽은 사람들이 입소하는 어느 월요일에서 그들이 모두 퇴소하는 주말을 지나 또다른 신참 사자(死者)들을 받는 다음 월요일에 끝난다. 죽은 자들은 모두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리려고 애쓴다. 어느 할머니는 간토 대지진 때 대나무 숲에서 그네를 타며 어머니가 만들어준 주먹밥을 먹던 순간을 최고의 행복으로 꼽는다. 한 남자는 처음 비행기를 몰았을 때 하늘에서 빛나던 구름을 회상한다. 어느 소녀는 아주 어렸을 때 자신의 귀를 우벼주던 어머니의 정겨운 무릎 감촉을 고른다.
영화 속에서 림보는 아주 순박한 공간이다. 사람이 일생 동안 지니게 된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단 하나의 아름다운 기억만을 주입시켜 영원의 시간 속으로 보내는 이 환상의 역사(驛舍)는 SF 소설에서 독자들이 흔히 마주치는 전지전능의 첨단 테크놀로지 공간이 아니다. 림보는 차라리 시골 마을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한적한 기숙사 같은 분위기다. 그곳에는 컴퓨터도, 로봇도, 휴대폰도 없다. 허름하고 쓸쓸한 이 정거장의 면접관들은 술을 마시고 장기를 두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이승의 사람들처럼 별다른 악의없이 동료를 속이기도 하고, 얼그레이차를 만족스럽게 홀짝거리기도 하고, 더러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끼워진 자신들의 팔자를 한탄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죽은 사람들의 행동과 의식은 이승에서와 너무 닮았다. 그런 닮음이 내뿜는 기묘한 정조는 문득 이 영화를 죽음과 삶이 아스라하게 뒤섞여 있는 <은하철도 999>의 분위기로 감싼다.
이야기는 면접관 가운데 한 사람인 모치즈키를 중심으로 흐른다. 그는 20대의 팔팔한 나이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필리핀 전선에서 사망한 군인이다. 살아 있다면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그의 외모는 20대다. 그가 20대에 죽었기 때문이다. 모치즈키가 영원의 시간 속으로 가지 않고 림보에 남아 있는 것은 50년 전 이곳에서 자기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골라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교코라는 여자와 약혼했지만, 전사하는 바람에 사랑을 완성할 수가 없었다.
모치즈키에게 와타나베라는 사내가 맡겨진다. 70여년의 삶을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와타나베는 인생살이에서 모든 것이 그만그만했을 뿐이라며 정말로 좋았던 추억을 쉬이 골라내지 못한다.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의 기억을 돕기 위해 이 죽은 노인의 일생이 담긴 비디오를 그에게 보여준다. 와타나베와 함께 그의 비디오를 보던 모치즈키는 수년 전에 죽은 와타나베의 아내가 자신의 약혼녀 교코라는 것을 알고 번뇌에 빠진다. 그에게 유일한 여자였던 교코가 자신이 죽은 지 얼마 안 돼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그는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와타나베 역시 모치즈키와 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자기 아내의 약혼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아내와의 어떤 순간을 영원한 기억으로 선택해 림보를 떠난 와타나베는 모치즈키에게 남긴 편지를 통해서 교코가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죽은 약혼자 얘기를 했다고, 아내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당신을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두 남자는 서로를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모치즈키는 자료실을 뒤져 수년 전에 죽은 교코의 파일을 찾아낸다. 교코가 림보에서 고른 가장 아름다움 추억은, 놀라워라, 약혼자 모치즈키가 전선으로 떠나기 전 둘이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순간이었다. 교코는 5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산 남편과의 추억 대신에 젊어서 죽은 약혼자와의 추억을 자신의 영원한 기억으로 선택한 것이다. 모치츠키가 감동에 차 말한다. “이제야 알았어. 내가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그는 교코와의 추억을 골라 영원의 시간 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차린다.
영화관을 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의,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누군가의, 단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일 수 있을까? 단지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곁에 있지 않더라도 단지 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