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막을 내린 <아시아 리얼리즘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국 작가의 그림이었다. 다른 나라 작가들의 작품에 견줘, 압도적으로… 컸다. 벽 하나를 온통 다 차지하고 있었다. 스케일로 밀어붙이는 ‘차이나스러움’의 진경이랄까.
13억 인구의 나라답게 그 몸짓 하나에 지구촌이 들썩인다. 지난 9월 센카쿠 열도에서 중국 어선이 일본 순시선과 충돌해 빚어진 중-일 갈등에서 일본은 중국 선장 석방이라는 ‘백기’를 들었다. 이런저런 교역·교류 중단이라는 중국의 강경한 태도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지만, 영토 분쟁과 관련된 사안에서 중국은 늘 이래왔다. ‘팽창’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오히려 중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중적이다. 고속성장하는 중국의 값싼 노동력은 이용하되 정작 그 중국 인민들이 고속성장해 잘살기는 바라지 않는 심리 혹은 편견 말이다. 돈은 왕서방을 상대로 벌고 휴가는 톰과 함께? 그거야말로 고약한 심보다. 중국 패권주의에 대한 우려에는 다분히 미국 중심적인 사고가 배어 있다. 실제 중국 위협론이나 견제론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미국의 개입 여지를 넓히는 결과를 낳았다. 이번 중-일 갈등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미국은 1980년대 초 일본의 돈줄을 움켜쥐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중국을 상대로 위안화 절상이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 세계 경제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1차 수혜자는 재정·무역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이다.
중국의 다음 주석 자리를 따논 시진핑 아저씨는 ‘포용성 성장’을 기치로 내걸었다. 노인들에게 주는 교통비까지도 아까워하는 총리가 있는 2010년의 남한 땅에 사는 나로서는 이 말이 돌돌핍인(기세가 등등하다)이나 도광양회(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만큼이나 낯설다. 중국 공산당은 시 아저씨를 차기 권력자로 내세우면서 ‘성장보다는 분배로, 국부보다는 민부로, 세계의 공장에서 첨단산업 강국으로’라는 미래전략도 내놓았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환경악화 등 3대 난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지난 9월 원자바오 총리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중국은 여전히 개발도상국”이라면서도 “중국의 개발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거나 어느 누구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서워하지도 무시하지도 말라는 주문 같다. 안팎으로 그들은 스케일에 스타일까지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