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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시네마나우] 세계화의 숨은 공로자

‘가와기타 영화기념관’에서 발견한 일본 영화사의 족적, 마담 가와기타

올 4월에 개관한 ‘가와기타 영화기념관’ 모습과 생전의 마담 가와기타. 이곳은 가와기타 부부의 옛 저택을 개조했다.

지난 4월 도쿄 근교 가마쿠라에 ‘가와기타 영화기념관’이 새로이 문을 열었다. 비록 작고 소박한 규모이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기념관이다. 일본영화가 1930년대부터 해외에 소개되고,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세계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데에는 숨은 공로자가 있다. 바로 가와기타 가시코, 즉 ‘마담 가와기타’다. 그녀는 1929년 당시 외화를 전문적으로 수입하던 도와상사에 입사하였다. 그리고, 도와의 사장이던 나가마사 가와기타를 만나 결혼하였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미조구치 겐지 영화의 영어자막을 만드는가 하면, 유럽을 방문하여 외화를 구매하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그녀가 구매하여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는 장 르누아르, 르네 클레르, 줄리앙 뒤비비에의 작품 등 그야말로 영화사에 길이 남는 주옥 같은 작품들이었다. 그녀가 신혼여행길에 독일에서 보고 수입한 <제복의 처녀>(1933)는 일본에서 엄청난 흥행을 불러왔으며 이 일화는 오늘날까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마담 가와기타는 그러한 활동을 통해 유럽의 쟁쟁한 거장들과 주요 영화제들과 인연을 쌓기 시작했다. 이렇게 쌓은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영화가 유럽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시미즈 히로시의 <바람의 아이들>, 도모다카 다사카의 <5인의 정찰병>,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등이 베니스영화제에 진출하고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5년에 딸 가즈코가 런던에 유학 가면서 마담 가와기타도 2년여 동안 런던에 같이 머물렀다. 런던에 체류하면서 마담 가와기타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영국의 BFI 등을 방문하고 연구 활동을 하면서 영상자료 보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당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앙리 랑글루아에게서 프랑스와 일본영화 교류전을 제안받기도 하였으나 당시 일본에는 제대로 된 필름 라이브러리가 없어 성사되지 못했다. 기회는 1960년에 다시 찾아왔다. 당시 프랑스 문화성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일본을 방문하였고, 다시 프랑스·일본 영화 교류전을 제안하였다. 마담 가와기타는 이제는 더이상 거절할 수 없다고 판단, 필름라이브러리 조성협의회를 만들어 100여편의 프린트를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일본 영화 교류전을 성공리에 치를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일본영화의 해외 소개에 일생을 바치기로 하고, 자료수집 및 해외에서의 일본영화제 개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9년에는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 내에 필름센터를 만드는 데도 일조하였고, 마침내 1982년에 사재를 털어 ‘가와기타 기념 영화문화재단’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생전에 칸·베를린·베니스영화제 등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을 26회나 역임하는 등 일본영화의 홍보대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녀의 왕성한 활동은 1993년에 멈췄다. 딸 가즈코가 타개한 뒤 51일째였다.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1996년부터 도쿄의 한조몬에 있는 가와기타 기념 영화문화재단을 찾아 일본영화 신작을 고른다. 가와기타 기념 영화문화재단쪽은 연중 세계의 주요 영화제 집행위원장이나 프로그래머들이 일본영화 신작을 한자리에서 보고 초청해갈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마담 가와기타의 유지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기리는 ‘가와기타 영화기념관’이 올해 4월에 개관하였다. 가와기타 부부의 옛 저택을 개조하여 만든 이곳은 일본을 방문한 수많은 세계의 거장들이 가와기타 부부의 초청으로 머물다 간 곳이기도 하다. 마담 가와기타의 삶은 기본적으로는 시네필의 그것이지만, 그녀의 열정이 얼마나 커다란 업적을 남겼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처럼 세계 영화사의 이면에는 태양만큼 빛나는 그림자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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