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피와 살을 섭취하는 퀴르발 남작, 아서 코난 도일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를 푸는 셜록 홈스, 중세 말 악마의 하수인에서 현대 패션의 아이콘이 된 마녀, 고딕 공포물의 단골 손님 프랑켄슈타인이 여기 등장한다. 화려한 출연진이다. 등장인물이 아니라 출연진이라고?
최제훈의 첫 번째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은 뭐랄까, 소설과 영화, 언론매체와 블로그, 강의와 수다를 종횡무진 오간다. 최제훈의 등단작이자 책의 첫 소설인 <퀴르발 남작의 성>은 미셸 페로의 이야기가 미국에서 영화화되고, 일본에서 리메이크되고, 미국판 영화를 보고 누군가가 대학 강의 교재로 사용하고, 일본판 영화를 보고 누군가 블로그에 글을 쓰고, 모방범죄가 일어나고 그에 대해 사람들이 인터뷰하는 과정이 시공간을 오가며 펼쳐진다.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서는 셜록 홈스가 왓슨에게 쓴 편지가 인용된다. 홈스는 한 밀실살인사건에 대해 적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피해자 이름이 아서 코난 도일이다. 어라? 독자가 고개를 갸웃할 무렵 홈스는 아서 코난 도일이라는, 자기가 보기엔 별 볼일 없는 작가에 대해 부연한다. “내 머릿속의 소중한 다락방을 그런 비실용적인 지식으로 채워넣을 수는 없지. 도일 경이 쓴 추리물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내가 추리할 수 있는 건 그가 변변찮은 의사였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일세. 개업까지 했던 의사가 얼마나 한가했으면 그런 서푼짜리 잡문이나 쓰며 지냈겠는가.” 하지만 평소처럼 아름답고 완벽한 논리를 동원해 사건을 설명하던 셜록 홈스는 피해자가 자신의 머릿속을 미리 읽어낸 듯한 상황이 전개되자 “도일 경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내 관찰과 추리를 미리 예측할 수 있었을까?”라며 고민에 빠진다.
이는 <퀴르발 남작의 성>에 한국소설이라는 국적의 꼬리표를 달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우정을 유지해온 이성친구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뒤 포토숍의 힘을 빌려 그들의 행복을 훼방놓으려다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 한 여자에 대한 <그녀의 매듭>이나 자발적으로 다중인격이 된 남자에 대한 <그림자 박제>, 실존하지 않는 누군가의 존재를 빚어 실존하는 관계를 굴려가는 사람들에 대한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는 한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지만 이 단편들의 활동무대를 ‘한국’이라고 제한할 필요는 없다. 상상 속의 친구, 다중인격, 포토숍과 원조교제 등의 이야기는 특정 국가의 고유한 문화를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저쪽의 이야기가 이쪽에서 쉽게 받아들여지듯, 이쪽의 상상력이 저쪽을 넘나든다. 몇몇 등장인물은 수십번, 수백번 소비되어온 대중문화의 인기 스타들. 소설을 읽으며 내 머릿속 기억을 더듬다보면 금세 단편집의 모든 등장인물이 재등장해 자기 목소리로 난장을 부리는 마지막 단편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