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시골닭집의 상호가 ‘켄터키촌닭집’이었다며 어쩌다가 토종닭의 상징성을 켄터키가 대신하게 됐냐고 개탄하는 토막이 있다. 지금이야 국산 브랜드도 많고, 패스트푸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아 덜할지 모르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는 ‘프라이드치킨’과 ‘켄터키’ 사이에는 강철보다 단단한 관계가 성립했었다. 아마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에게 “켄터키 하면 뭐가 떠올라?” 하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망설임 없이 프라이드치킨이라고 대답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에서도 그 사정이 비슷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켄터키주 렉싱턴을 주무대로 삼은 <FX>의 TV시리즈 <저스티파이드>를 보면 프라이드치킨이 제법 여러 곳에서 활약한다.
첫 번째 활약상이다. 지난밤 남편에게 매맞던 아내가 그를 엽총으로 쏘아 죽인 뒤 동네 오빠로 알고 지낸 보안관에게 “이따가 말이야, 저녁 먹으러 들르지 않을래? 치킨 몇 조각 사다가 튀기고, 따뜻한 비스킷이랑 그레이비 소스도 곁들일 건데 말이야”라며 넌지시 유혹한다. 여자는, 머리채를 잡고 벨트를 휘두르던 거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로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렸다가 남편이 방심한 순간 총을 들었다고 무미건조하게 살인을 시인하는데, 이 죄책감이라고는 없는 여자의 이름은 에바 크라우더(조엘 카터)이고, 에이바의 눈웃음이며 애교있는 고갯짓을 받아주는 남자가 바로 <저스티파이드>의 주인공인 미연방보안관 레일런 기븐스(티모시 올리펀트)다. 스테트슨 모자(카우보이 모자)를 법정과 침대 위를 빼면 어디에서든 쓰고 있는 레일런은 서부영화에서 꺼내온 듯한 캐릭터다. 컨트리에 힙합을 접목한 오프닝 주제곡도 이 의혹에 무게를 더한다. 다시 말해, <저스티파이드>는 미국 중남부에서 펼쳐지는 모던한 서부극이다. 총든 사람이 무법자가 아닌 보안관이라는 게 좀 다를 뿐이다.
막나가는 경찰, 범죄로 들끊는 고향으로 좌천
<저스티파이드>의 서막은 마이애미에서 올라간다. 도주 중이던 현장범에게 레일런이 “24시간 안에 이곳을 떠나라. 다음번에 눈에 띄면 쏴버리겠다”고 경고하는데, 그 경고는 첫 에피소드가 시작한 지 채 3분이 되기 전에 현실이 된다. 마이애미의 고급호텔 야외 레스토랑에서 레일런과 마주앉은 용의자는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맛보기도 전에 심장에 정확히 세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다. 총격사건 조사를 위해 나온 검사에게 레일런은 말한다. 그가 먼저 총을 들었고, 그래서 쏘았다. 하지만 정당방위라고 하는 이런 식의 총격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레일런은 고향인 켄터키의 할란으로 좌천당한다.
켄터키는 북미대륙 동부에서도 중앙부에 위치한 주인데, 흔히 ‘남부’라고 부르는 미국 남부지역의 경계가 되는 테네시주와 인접해 있어서 준남부지역으로 포함시킨다. 소득수준이나 생활수준, 교육수준이 여타의 대도시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낮다고 알려져 있다. 할란 카운티는 켄터키에서도 동부지역으로, 가정해보건대 드라마 속 청춘에게는 선택이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고향을 떠나거나 광부가 되거나, 둘 중 한 가지 삶을 종용받았고, 소년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레일런은 과거의 유령들과 마주해야 한다. 퇴역군인인 아버지는 평생을 불같은 성질을 다스리지 못해 감옥을 드나들었고, 전처 위노나는 렉싱턴 법원의 서기라 좋든 싫든 마주칠 운명이다.
그리고 그가 귀향하는 전날 밤, 환영이라도 하듯 렉싱턴은 범죄로 들끓었다. 에바는 남편 보우먼을 저녁식탁에서 죽였고, 보우먼의 형인 보이드(월터 고긴스)는 흑인 교회를 향해 로켓포를 발사했다. 목격자 중 한 사람은 폭파 직전 “Fire in the hole!”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레일런은 이를 단서로 범인을 어린 시절 함께 석탄을 캤던 보이드라고 확신한다. 탄광의 갱정에 폭발물을 설치할 때 보이드가 늘 그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한때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은 이제 한 사람은 보안관이, 다른 한 사람은 “유대인과 흑인을 추출할 도덕적 의무”가 성경에 적혀 있다고 주장하는 네오나치주의자가 되어 재회한다. 팽팽한 긴장 속에 보이드는 마이애미 사건을 언급하며 묻는다. “기회가 되면 날 쏠 건가?” “내가 방아쇠를 당기게 만들어, 그럼 널 눕혀주지.”
<저스티파이드>의 파일럿은 스티븐 킹, 쿠엔틴 타란티노 등이 존경해 마지않는 미국의 작가 엘모어 레너드의 단편 <Fire in the Hole>(2001)을 각색해 만든 이야기다. 레일런 기븐스 역시 레너드가 1990년대에 쓴 소설 <Pronto>와 <Riding the Rap>에 등장한 캐릭터로, 드라마는 파일럿 대사의 대부분을 원작에서 고스란히 가져왔다. “독자가 지루해 건너뛸 부분이라면 쓰지 않는다”는 원작자의 철학을 드라마 제작에서도 따른 주인공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 <퍼시픽> 등 전쟁서사극을 TV시리즈로 제작한 전력의 그레이엄 요스트다. 필사를 하듯 이야기의 질감까지 화면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 요스트는, 원작의 결말을 뒤집어 보이드를 살려둠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했다.
어쩌면 <저스티파이드>를 4자로 표현하면 ‘정당방위’(Justified)보다는 ‘청출어람’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원작을 배반하고 목숨을 부지한 보이드는 신의 뜻으로 커다란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고 말하는데, 출소한 뒤에는 산촌에 부랑자들을 불러모아 교회를 세우고 극한의 절제와 선을 추구한다. 보이드는 도리어 레일런에게 “신이 너에게 맡긴 도구 역할에 충실했음에 고맙다”고까지 하는데, 레일런은 보이드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예의주시한다. 레일런과 개과천선한 보이드의 대결구도는 구세대인 아버지들로 가지를 뻗으며 입체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구세대 사이의 오랜 대결구도도 그렇지만, 아들들과 아버지들 사이에도 긴장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교회를 집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보이드는, 아버지인 보 크라우더와 거래하는 마약 공장을 폭파시키고, 플로리다에서 공급받던 수송차도 로켓포로 날려버린다. 보 크라우더 역시 “말 안 듣는 아이에게는 매가 약”이라며 보이드의 신도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인다. 여기에 파일럿의 총격사건 뒤로 끊임없이 레일런을 암살하려고 했던 마이애미의 범죄 조직이 끼어들며 예기치 않는 죽음들이 발생한다.
WWED, 엘모어 레너드라면 어떻게 했을까?
<저스티파이드>의 시즌1은, 이 예기치 않은 죽음들에 복수하려는 피 묻은 손에 총을 쥐어준 집행관의 뒷모습을 석양이 지는 하늘과 함께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여느 TV시리즈의 파이널들이 상습적으로 채택하는 극적인 결말은 아니지만 아쉬움보다 더 진한 여운을 남겼기에 개인적으로는 몹시 마음에 들었다. ‘엘모어 레너드라면 어떻게 했을까?’(What Would Elmore Do?)의 줄임말인 WWED를 촬영장에서 사용하는 소품에 새겨두었다는 소문처럼 원작자가 만든 세계를 고수하고픈 제작팀의 노력이 마지막까지 빛을 발했으리라. 남성 주요 시청자층인 18~49살이 꼽은 “2010년 최고의 새 TV시리즈”의 영광이나, <FX> 내 최고 시청자 수라는 신기록도 그냥 얻어진 영예일 리 없다.
그러고 보니 프라이드치킨의 두 번째 활약상을 잊을 뻔했다. 켄터키의 프라이드치킨은 시즌 중반에서 한번 더 진가를 발휘한다. 보안관 사무실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죄수를 달래려고 레일런이 미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엑스트라 핫 스파이시 치킨’ 한 조각, 그리고 역시 켄터키주 버번 카운티의 이름에서 따온 버번 위스키 한잔이 묘약이었다. 그러니까 프라이드치킨은, 몇년 만에 해후한 첫사랑에게 저녁 한끼를 구하는 좋은 구실이 되어주고, 벼랑 끝에 선 한 남자의 마음을 달래는 위안인 셈이다. 사실 나는 닭요리를 먹지 않는다. 변명거리야 많지만, <저스티파이드>에서 레일런이 치킨을 물어뜯는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간다. 아마도 그건 프라이드치킨이 미국 사람들에게는 고향집에서 먹을 수 있는 가정식이기에, 나에게도 그와 비슷한 상징으로 다가와서인지도 모르겠다. KFC TV광고의 CM송이었던 <My Old Kentucky Home>의 가사가 집 떠난 누군가의 향수를 노래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