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의 느릿하고 반복적인, 리듬을 타는 듯하지만 그저 팔다리를 흔들 뿐인 무의미한 몸짓. 우스꽝스럽지만, 지금 이 광경이 무한반복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오싹함. 아, 그런데 웃기긴 웃기고 무섭기도 하고,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우울함도 훅 일어나고.
<좀비들>에는 제목대로 좀비들이 등장한다. 좀비들을 만나기까지는 일단 기다려야 한다. 좀비들이 등장하기까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묘한 말이지만 이들은 좀비에게 독자를 이끄는 통로이자, 어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하얀 토끼 같은 존재다. 주인공인 지훈은 휴대전화 수신감도를 측정하는 일을 하며 전국을 떠돈다. 차에서 생활하는 그는 형이 남긴 유산 중 LP를 가지고 다니며 듣는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동차에서 LP를 안정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장치가 트렁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우연히 어떤 전파도 잡히지 않는 무통신지역인 고리오 마을을 알게 된다. 그 즈음 지훈은 잘 알려지지 않은 60년대 괴짜 록그룹 스톤 플라워와 관련된 자료를 찾던 도중 도서관에서 일하는 남자를 만나 친구가 되는데, 그는 ‘뚱보130’이라고 자칭하는 거구. 그 둘은 홍혜정이라는 번역자를 찾아 고리오 마을을 찾게 되고 지훈이 고리오 마을 인근 집에 머물게 되면서 세 사람은 친구가 된다. 홍혜정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 딸 홍이안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지훈과 뚱보130에게는 따뜻한 할머니였던 홍혜정을, 이안은 가차없이 냉소한다. 홍혜정의 삶의 이면이 드러나는 즈음, 지훈과 뚱보130 앞에는 좀비가 등장한다.
<좀비들>은 바이러스처럼 번져가는 좀비들이 세상에 쏟아져나와 공포를 조성하는 공포물이 아니다.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좀비와의 사투가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마주하는 건 과거의 편린이다. 좀비라는 존재가 죽은 자들의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귀환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좀비들이 누구인지가 밝혀지는 순간, 왜 고리오 마을 사람들이 좀비처럼 살다 죽어갔는가를 알게 된다. 이것은 관계의 미스터리에 가깝다. 포기한 관계를 포기할 수 없었음을 깨닫는다든가, 끊어냈다고 생각했던 존재를 등에 업은 채 살아가야 한다든가 하는 일. 이국의 록그룹이 매개가 된 우정은 실제 가족보다 은근하고 끈기있게 유지될 수 있지만 실제 피로 이어진 가족은 척을 지고 서로를 부정하는 일. 그렇게 엉뚱한 방식으로, 비참한 풍경이 되어 눈앞에 도착한 과거의 육체.
스톤 플라워라는 존재의 힌트를 제공했을 법한 스톤 로지스의 앨범을 틀어놓고 <좀비들>을 읽다보면, 이 이야기의 시공간이 좀더 복잡하게, 동시에 풍부하게 와닿는다. 지훈이 듣는 음악이 CD나 MP3가 아닌 LP로 재생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좀비들이 과거에서 ‘돌아온’ 존재임을 기억하자. 이 책 속 군인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미래영화의 군인들 같은 데가 있다는 점도 묘한 심상을 만들어내는데, 예컨대 미친 과학자에 가까운 장군과 그의 졸개들은 목표에 맹목적인 인간 특유의 광기어린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화 캐릭터 같아서 등장인물들도 독자들도 크게 걱정하지 않게 한다. 김중혁식 좀비 소설의 우수어린 유머감각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