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샤브롤 영화에서 먹는 행위는 정찬부터 마담 보바리가 삼킨 비소까지 죄다 중요하다. 어록을 찾아보니 샤브롤 감독은 먹기를 즐겼을뿐더러 식사신을 촬영할 때 배우들이 대사만 하고 제대로 먹지 않는 방식의 연출을 아주 싫어했던 모양이다. 애연가이기도 해서 사진마다 파이프나 담배가 손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여러모로 인간의 ‘용적’을 바닥까지 드러내는 영화들이었다.
9월8일
무슨 거울도 아닌데 우리는 스크린을 마주보기만 한다. 지정된 한점에 기꺼이 못 박혀 영화를 본다. 혹시 스크린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곁눈질하고 싶은 적이 없었나? 영사실 앞에 우뚝 일어서 내 그림자를 일부러 영화에 얹어보길 원했던 일은? 단 한번도? 스크린 뒤로 숨어들어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보고 싶지는 않았던가? 방법은, 부쩍 영화관과 닮아가는 현대미술 갤러리에 가는 것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프리미티브> 연작이 ‘미디어 시티 서울 2010’에 왔다. 과거와 미래의 일기를 편집한 책이 놓여 있는 입구를 지나, 어두운 전시실에 들어서면 여섯편의 비디오가 가로 세로로 놓인 개별 스크린에서 무한반복된다. 관람자를 에워싼 화면 속 공간은 모두 타이-라오스 국경의 촌락 나부아. 내전 학살로 이데올로기도 기억도 절멸된 마을에서 감독은 죽은 농부들의 대지와 그 아들들을 찍었다. 청년들과 함께 달리고 벌판에 우주선을 짓고 기구를 쏘아 올린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 기억과 운동이 들풀처럼 돋아난다.
전시장 맞은편에 기억에 새겨진 이름이 보인다. 더글러스 고든. 2006년 영화 <지단: 21세기의 초상>(Zidane A 21st Century Portrait)을 공동 연출한 아티스트다. <지단: 21세기의 초상>은 레알 마드리드와 비야 레알의 리그 경기에서 게임의 흐름은 아랑곳없이 오직 불세출의 미드필더 지네딘 지단의 얼굴과 움직임을 17대의 카메라로 90분 동안 주시한 영화였다. 우리가 보는 것은 슛이나 어시스트가 아니라 온 신경을 공의 향배에 집중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걷고 달리는 인간이다. 앞서 고든은 히치콕의 <싸이코>를 1초에 2프레임씩 상영하는 프로젝트 <24시간 사이코>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에게 영화는, 그냥 풍경이고 물상이다. 미술가로서 얼마든 가져다 쓸 수 있는. ‘미디어 시티 서울’에 온 고든의 작품은 <당나귀와 함께한 고행>(Travail with My Donkeys)이다. 원래 프랑스 아비뇽 대성당에 설치됐다는 이 작품의 의도는 복잡해 보이지 않는다. 두개의 스크린과 한대의 소형 브라운관 TV는 중세 기독교에서 게으르고 우둔한 동물로 비하됐던 당나귀들이 아비뇽의 성스러운 건물 안을 무심히 걸어다니고 자연스레 배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나귀들의 천부적 겸양은, 인간이 신을 기리느라 지은 웅장한 돌벽과 사뭇 대조적이다. 아기 예수의 구유는 이 순한 짐승들의 지척에 있을 것 같다.
9월9일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보았다. 피카디리 극장에 갈 때면 언제나 그렇듯, <접속>을 회상하며 세찬 빗줄기 사이로 2층 커피숍을 올려다보았다.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현석 감독은 이번에도 연애에서 유형과 규칙을 찾으려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변수 몇개를 바로잡는다면 가련한 연애를 구원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곱씹는다. 한데 이번에는 ‘조작’이 과하다. 분방한 재미도 변칙- 규칙의 반명제- 의 범주 안에서 상상하니 갑갑하다. 감정은 떨리고 흐르는 것인데, 애초에 지어놓은 분류 외에 삐져나갈 곳이 없어서다. 로맨스 장르에 관한 장르영화임을 고려한다 해도, 규칙의 예화를 위해 끌어들인 요소들을 전부 매듭짓자니 후반으로 갈수록 영화의 몸이 무거워진다. 영화 속에 아내의 뒷모습을 그린 화가 빌헬름 하메르쇼이의 작품이 인용된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연인이 뒤돌아섰을 때야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일까.
22년 전 오늘은 시드니 루멧 감독의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가 처음 개봉된 날이다. 손꼽아보니 그해 이 영화에 출연한 리버 피닉스는 영화와 같은 제목을 가진 잭슨 브라운 노래에서처럼 열일곱살이었다. 그리고 영화 속 상대역 소녀 배우 마사 플림턴과 사귀고 있었다. 시간은 무수한 여름 들판과 더불어 사라져갔는데, 초록만 눈 속에 남아 짙어간다.
9월12일
주성철 기자로부터, 그가 코멘터리에 참여한 이만희 감독 컬렉션 DVD를 선사받았다. <휴일>을 보며 김승옥의 단편 <차나 한잔>을 떠올린다. 노동을 하지 않거나 하고 싶어도 못하는 <휴일>과 <차나 한잔>의 도시인에게 여가는 미로고 감옥이다. 현대영화의 배우는 무엇보다 피로를 연기하는 것이라는 말을 절감한다. 잊기 힘든 이상한 대사 한마디. “여자는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이상한 뜨개질 같은 솜씨를 가지고 있거든요.” 역시 잊기 힘든 술집 회벽의 씩씩하여 서글픈 낙서 한줄. “종달새처럼 즐겁게, 냇물처럼 꾸준히, 태양처럼 뜨겁게.”
9월13일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별세했다. 여든 번째 생일이 석달 전이었다. <초콜릿, 고마워>에 선곡했던 리스트의 장송곡은 그를 영결하는 자리에도 흘렀을까. 샤브롤의 말년은 부르주아 가족을 해부한 실내 스릴러로 기억된다. 어느 막장 드라마도 엄두를 못 낼 무시무시한 삼각, 사각관계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대가 무대이니만큼 여럿을 위해 잘 차린 식사장면이 유난히 많았다. 샤브롤 영화에서 먹는 행위는 정찬부터 마담 보바리가 삼킨 비소까지 죄다 중요하다. 어록을 찾아보니 샤브롤 감독은 먹기를 즐겼을뿐더러 식사신을 촬영할 때 배우들이 대사만 하고 제대로 먹지 않는 방식의 연출을 아주 싫어했던 모양이다. 애연가이기도 해서 사진마다 파이프나 담배가 손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여러모로 인간의 ‘용적’을 바닥까지 드러내는 영화들이었다. 에릭 로메르에 이어 클로드 샤브롤. 장수 비결이 무엇일까, 술자리 농담으로 이러쿵저러쿵했던 누벨바그 감독들이 홀연히 떠나간다. 정색하고 헤아려본다. 장 뤽 고다르 79살, 자크 리베트 82살, 알랭 레네 88살, 아네스 바르다 82살.
공교롭게 장 뤽 고다르에 관한 인터넷 소식. 프랑스에서 MP3를 무단 다운로드하다 고소당해 2만유로 벌금을 받은 청년 제임스 클리망의 소송비용에 고다르가 대리인을 통해 1천유로를 보탰다고 한다. 클리망쪽의 이야기뿐이라 완전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고다르는 평소 “지적재산권 같은 건 없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작품의 상속에 반대한다. 예술가의 자녀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의 작품 판권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성년 이후라면, 예컨대 모리스 라벨의 후손이 <볼레로>로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예술 보호육성책이 가장 잘 갖추어진 나라의 거장 감독이기에 가질 수 있는 신념이 아닐까.
9월15일
계간지 <문학동네>가 일본 잡지로부터 완역 전재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를 읽다. 소설의 인칭을 논하던 중 트란 안 훙 감독이 연출한 <노르웨이의 숲> 시사회에 다녀왔다는 언급이 나온다. “(영화를 보고 나니 <노르웨이의 숲>은) ‘나’가 다양한 풍경과 사건을 통과한 이야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설을 쓸 때는 일인칭 남자의 시선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 청년의 편력기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니까 네 여자의 이야기였어요. (중략) 즉, 스크린에서는 와타나베 도오루도 다른 등장인물과 똑같은 비중으로 보여지는 거예요. (후략)” 물론 영화가 인칭에 관해서는 본래 좀 난봉꾼이긴 하지만 이 말은 혹시 트란 안 훙의 영화에 대한 완곡한 주의 아닐까? <노르웨이의 숲>의 핵심에서 개성적인 열아홉살 청년이 세계와 맞닿는 감각과 혼돈을 제한다면, 그건 어쩌면 아무 이야기도 아닐 수 있다.
방한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KTX를 탔다는 뉴스 헤드라인을 보았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이런 뜻은 아니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