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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의 취향
강병진 2010-09-21

여러 사연 가진 인물들의 유머러스한 소동극 <퀴즈왕>

1년이 넘도록 우승자가 없었던 퀴즈쇼의 누적상금은 133억5천만원이다. “어떤 천재나 또라이도” 이 퀴즈쇼의 마지막 30번째 문제를 맞히지 못했다. <퀴즈왕>은 우연히 이 인생 역전의 정답을 알게 된 사람들의 소동극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30번째 문제의 정답을 알게 됐을까. 극중 퀴즈쇼의 프로그램 제목을 전면에 내걸고 있지만, 사실 <퀴즈왕>의 소동은 하나가 아니다. 이들이 한날한시에 모여 문제의 정답을 알게 된 그날의 사연. <퀴즈왕>의 웃음과 연출자인 장진의 묘미는 퀴즈쇼보다 이 또 다른 소동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강변북로 한복판에서 4중 연쇄충돌사고가 일어난다. 선두로 달리던 차에 한 여자가 뛰어들었다. 앞차에 의해 ‘토스’된 여자는 뒤차로 패스됐고, 여기서 받아친 여자를 세 번째 차는 피했는데, 네 번째 차는 땅에 떨어진 그녀를 밟고 세 번째 차의 후미를 들이받았다. 차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새벽의 용산경찰서 교통과에 모인다. 해결사인 도엽(김수로)과 상길(한길), 도박에 빠진 남편 상도(류승룡)와 그 때문에 속을 끓는 아내 필녀(장영남), 인터넷 카페 ‘우울증을 이겨내는 사람들’의 회원인 여나(심은경), 정상(김병옥), 상훈(이상훈), 천재 대학생 지용(이지용)과 그의 아버지 호만(송영창), 여기에 경찰이 그물을 쳐서 잡아온 중국집 배달원이자 폭주족인 철주(류덕환)와 친구들, 그리고 경찰까지. 이들은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던 도중, 그녀의 메모리 스틱에서 이상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이 곧 열릴 17번째 퀴즈왕의 마지막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차로 뛰어든 그녀가 이 프로그램의 문제 출제자였다는 사실까지. 조사가 끝나고 헤어진 사람들과 남겨진 경찰의 머릿속에는 100억원짜리 대박의 꿈이 꿈틀거린다.

장진 감독은 “전작과 달리 즐기면서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영화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장진 영화의 특징인 연극적이라는 것을 밀어붙여 아예 장진의 영화적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퀴즈왕>의 이 첫 번째 소동은 폐쇄적인 공간에 놓인 다양한 캐릭터들이 부대낀다는 점에서 연극적이고, 그것이 장진 감독이 해오던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가장 그다운 설정이다. 웃음의 색깔 또한 명확하다. 로맨틱코미디인 <아는 여자>부터 미스터리 스릴러였던 <박수칠 때 떠나라>, 조폭코미디인 <거룩한 계보>, 신파드라마인 <아들>, 그리고 대통령을 소재로 한 <굿모닝 프레지던트>까지의 전작이 장르의 법칙을 비틀고 장르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통해 웃음을 건져올렸다면, <퀴즈왕>의 이 소동은 캐릭터들이 서로 치고 빠지는 리듬을 통해 웃음을 일궈낸다. 자동차 모형으로 사고를 재연할 때, 피의자들은 조금이라도 불리하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그들이 사고 전에 겪은 사연이 부대끼고, 어울리지 않을 법한 사람들이 모인 터라 뜻밖의 상황을 만든다. 단지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흔히 말하는 장진사단의 배우들이 총출동한 이 영화에서 그들은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작가이자 감독에 의해 가장 잘 맞는 옷을 입고 있다. 이들의 단체기념사진처럼 보이기도 하는 <퀴즈왕>은 그들을 조망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가득한 영화다. 웃음의 세기는 둘째치더라도 일단 양적인 면에서 많다.

1부에 해당하는 교통과 소동이 다종다양한 유머에 집중한다면, 2부인 퀴즈쇼는 긴장감에 주력한다. 영화는 퀴즈쇼를 만드는 제작진의 음모를 설정한다. 문제를 미리 본 이들의 비밀을 꿰고 있는 또 다른 경찰까지 등장해 만약 이들이 우승할 경우, 수갑을 채울 준비를 하고 있다. 과연 우승자는 나타날 것인가.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퀴즈쇼의 배후에 도사린 이 음모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물론 이런 가운데에서도 돈을 챙기려는 꼼수와 허황된 답을 말하는 참가자들이 간간이 웃음을 흘린다. 참가자들이 퀴즈쇼를 통해 자기 안의 무언가를 발견하는 몇몇 순간은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중국집 철가방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사회자의 태도에 자신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항변하고, 아내에게 무심했던 남편은 사랑을 고백하고, 우울증을 겪던 남자는 “이제는 우울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찰서에서 날고 기었던 캐릭터의 생기는 퀴즈쇼에 와서 잦아들고, 긴장은 조여들지 않는다. 생방송 퀴즈쇼라는 형식은 있으나 정작 퀴즈쇼의 묘미는 전하지 않기 때문인 듯 보인다. 지금까지 누구도 우승하지 못한 이 퀴즈쇼의 문제는 정말 어렵다. 그들이 정답을 맞혀도, 아님 틀려도 그것은 시나리오에 짜여져 있는 것일 뿐, 관객에게까지 환호와 안타까움을 전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문제의 비밀이 밝혀지는 결말은 영화의 두 가지 소동을 만족스럽게 마무리하기에 어색하다. 마지막에 이른 영화가 퀴즈쇼의 참가자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휴머니즘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이 또한 장진이 자신의 영화를 통해 강조해온 것이지만, 영화의 전개상 이 해결방식은 첫 번째 소동에서 토스된 웃음을 공격방향과 상관없는 곳으로 패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퀴즈왕>은 여러모로 장진의 취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생방송이란 공개된 공간을 무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킬러들의 수다>의 마지막 연극공연 시퀀스와 <아는 여자>의 마지막 야구경기가 연상되고, 장진의 데뷔작인 <기막힌 사내들>부터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한 경찰서란 공간은 캐릭터들이 자신의 성격과 사연을 토해내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다. 장르와 소재상 다르지만 <퀴즈왕>과 가장 많은 키워드를 나누고 있는 전작은 <박수칠 때 떠나라>다. 한 여인의 죽음. 그로 인해 경찰서에 모인 수많은 사람과 그들의 사연.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수사과정. 무엇보다 “누가 그녀를 죽였을까”에서 “그녀는 왜 죽었을까”로 이어지는 질문의 전환. 또한 이 영화는 장진 감독이 자신의 연극을 영화한 작품이었다. 게다가 <박수칠 때 떠나라> 또한 이 모든 키워드가 서로 조응하지 않은 탓에 석연치 않은 느낌으로 마무리된 영화였다. 그처럼 <퀴즈왕>은 장진의 장기와 취향, 그리고 그의 몇몇 전작들이 가진 무리수가 함께 드러난 영화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스타일을 밀어붙이려 했다면, 퀴즈쇼의 성격과 배후에 힘을 주는 대신 소시민들이 잠시 꾸는 꿈을 담백하게 묘사했다면 어땠을까. 나아지지 않는 삶을 감싸는 따뜻한 웃음이 장진의 영화와 연극이 갖고 있던 태도였다.

영화 속 퀴즈, 어떻게 냈을까?

<퀴즈왕>의 퀴즈는 첫 문제부터 황당하다. 수많은 동물을 언급하는 문장을 읽어준 뒤, 이 문장에 나오는 동물 중 <콩쥐 팥쥐>에서 콩쥐를 도와주지 않은 동물들이 있는데, 이 동물들간의 규칙을 보여주는 숫자는 뭐냐는 식이다. 극중에서 퀴즈쇼를 지켜본 대학교수는 “문학 플러스 일반상식 플러스 연산, 추리”의 혼합형 문제라고 분석한다. 우승자가 한명도 없었던 퀴즈쇼라지만,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이런 퀴즈를 제출한 건 물론 장진 감독이다. 처음부터 이런 식의 문제를 낼려고 한 건 아니었다. “퀴즈에도 저작권이 있는 거 아나? 퀴즈와 보기까지 퀴즈를 낸 사람, 혹은 그 퀴즈가 나와 있는 책의 출판사가 저작권을 갖고 있다. 그대로 가져와도 누가 왜 베꼈냐고 그러지는 않겠지만, 이것도 작가의 영역이라고 하니 자존심이 걸리더라. 그러다보니 연산을 대입한 복합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극중 프로그램상의 퀴즈가 30개. 여기에 등장인물이 퀴즈쇼를 준비하며 서로에게 내고 맞히는 퀴즈까지 작가적인 상상력에서 나왔다. 물론 이들이 공부를 할 때는 정답이 아닌 오답이 웃음의 동력이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란 뻔한 퀴즈를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의미심장한 오답을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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