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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1]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를 보고 경이로움에 빠진 어느 관객의 길고 긴 고백

<옥희의 영화>

우연을 선별적으로 수긍하는 것, 이보다 더 좋은 홍상수적 긍정이 있을 것인가. 거기에서 시작하고 싶다. 이런 자세는 전적으로 <옥희의 영화>라는 ‘신비’를 마주하면서 얻은 도취와 충격 때문에 생긴 것인데, 여하간 기사도 비평문도 그렇다고 에세이도 아닌 괴상한 그 무엇이 되기를 희망하는 이 글은 <옥희의 영화>를 관람할 때 느껴지는 그 경이로움의 전조를 얼마간이라도 미리 전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시도됐다. 그러므로 어떤 우연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출장 중 머무른 숙소의 몇 십층 아래로 아담한 유원지가 펼쳐져 있었는데 거기 두개의 놀이기구가 있었다. 롤러코스터와 관람차. 전자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좀 잊힌 것이다(그러므로 그림1 참조). 우리가 흔히, 질주하는 쾌속의 영화를 보고 나서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단지 비유가 아니라 명징한 감각적 근거가 있다.“눈 깜짝할 사이”라고 묘사되는 그 쾌락의 정체에는 내 감각의 자율적 활동을 제압한 것에 대한 승복이 있다. 그런데 너무 선선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낯익은 감각에 몰입할 때, 우리는 그런 걸 또 상투적이라고도 한다.

롤러코스터가 상투적이라면 관람차는 초현실주의적이다. 후자를 비상투적이라고 써야 대구가 맞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초현실주의는 결국 상투와의 싸움 과정 중에 나온 더 정교한 방법 중 하나이므로 그냥 써도 될 것이다. 롤러코스터는 오르막길을 서서히 오르고 난 뒤(기) 조금 빠르고 재미난 구간을 지나(승) 가장 현기증 나는 전복 2회전을 한 다음(전) 천천히 떠난 입구로 돌아온다(결). 출발하고 나서 정지하기까지 롤러코스터의 안전핀은 단 한번 닫혔다가 풀리며 거기엔 그 누구도 열외가 없고, 있으면 엉망진창 큰일이 난다. 관람차는 다르다. 먼저 이 초현실주의적 놀이기구에는 획일성이 없다. 그 안에 탄 당신은 첫사랑의 입맞춤을 해도 되고 혹은 외롭게 혼자일 수도 있고 시선은 바깥에 둘 수도 있고 안 그래도 되고 내다본다 해도 각자 다른 걸 볼 여지가 있다. 애초부터 여기에 타기 위해 발판에 올라선 당신은 1호차에도 3호차에도 7호차에도 그 어느 차에도 탈 가능성이 있으며 게다가 그건 당신의 선택이기보다 그때 그 앞에 당도한 그 모형차와의 우연적인 만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관람차를 탄 우리는 뼈대가 된 원형의 구조물에 어떻게든 선이 닿아 있는 것이겠지만 그 끝에 매달린 작은 모형차 안에 있으므로 서로간에 일정한 너비를 두고 각자 동떨어져 있는 조각들이며, 상하로 천천히 움직이는 전체의 원운동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와 무관하게 양옆으로 또한 조금씩 흔들린다. 전체가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 각각의 모형차는 또 다른 방향으로 자율적이다. 그러므로 비유컨대 롤러코스터와 관람차 둘 중 어떤 감각으로 삶을 볼 것인가. 아니 애초에 롤러코스터로 삶을 관람하는 게 가능은 한 것인가. 문득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경험을 “관람차를 탄 것처럼”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졌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사물의 정조에 이끌려 무리하게도 홍상수의 영화와 그 11번째 장편 <옥희의 영화>에 대한 얘기를 꺼냈는데, 이것이 무리라 해도 다름 아니라 우연이기에 나는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 <옥희의 영화>의 2부에서 주인공 진구(이선균)가 벤치 위에 있는 우유팩을 수첩에 그릴 때 들려오는 그의 절실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믿기 때문이다. “이 우유팩이 여기 놓여져 있는 이유를 알면 모든 걸 알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나는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것 때문에 우주의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왜 이건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세상의 모든 헛소리들은 다 필요없어. 그냥 왜 이게 여기 있어야 하는 거냐고. 왜 이게 지금 딱 여기 있는 거냐고!” 나의 질문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헛소리들은 다 필요없어. 이 관람차가 왜 지금 딱 여기 있는 거냐고!

<그림1>관람차

<그림2>만 레이 자화상을 기억에 의존해 그린 그림

‘아무것도 아닌 것’에 숨은 신비

우연은 선별되나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홍상수 영화의 뒷 장면이 무심코 지나쳤던 어떤 앞 장면을 무심결에 길어 올린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는데 같은 경험이 여기 있다. 그러니까 나는 관람차를 보았을 때 만 레이의 자화상 하나가 떠올랐다. 만 레이는 초현실주의자, 더 정확하게는 “나는 다다(Dada)”라고 선언한 다다이스트였고 그들 중 거의 유일하게 영화에 손을 댄 창작자인데, 그의 전시회를 그 전날 우연히 보았다. 제목도 없고 그려진 시기도 불분명한, 그저 자화상이라고만 되어 있는 작은 크기의 데생, 만 레이의 뇌였다. 그의 공식 사이트에도 자서전에도 없는 걸 보면 대표작은 아닌 것 같다(그러므로 기억에 의존해서 대강 그린 그림 =2 참조). 만 레이의 머릿속을 M, A, N, R, A, Y가 채우며 돌고 있고 눈이라고 짐작되는 두개의 점은 수상하게 엇갈려 찍혀 있으며 뇌로부터 연결된 안테나가 외부로 뻗어 있다. 그런데 관람차와 만 레이의 뇌 사이에는 관계가 있는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다만 닮은꼴 모형인 이 둘을 연이틀 보게 된 나의 경험을 “나란히 붙여 놓고(영화 속 옥희의 말)” <옥희의 영화>라는 세계의 틈 사이로 들어가고 싶어진 것이다.

“저는 다다의 결과물보다는 다다의 태도를 좋아하거든요”라고 홍상수가 말한 적이 있고 그의 영화 <오! 수정>의 영어 제목이 마르셀 뒤샹의 <그녀의 숭배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처녀>이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루이 아라공의 시구인 건 알려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다다가 아무 뜻이 없고 홍상수가 무의미를 중요시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다다이즘과 홍상수 사이에는 공유되는 바가 분명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비이성적(비논리적) 질서에 대한 찬미일 것이다. 하지만 “다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리하르트 휠젠베크)라고 유명하게 선언해봐야 그 말은 홍상수에게 ‘다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내게 (비논리적으로) 솔직해지고자 한다’라고 번안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로 중요한 말은 더도 덜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바로 이 말이다. 예컨대 다다이스트와 홍상수의 가장 중요한 공집합처럼 보이는 ‘꿈’조차 실은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일종이다.

여기서 부디 두 가지가 혼동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통 관심사가 있다 해도 다다이즘이라는 한 유파의 소동극을 홍상수가 전적으로 계승하고 있거나 그가 그것에 소속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혼동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다이스트를 포함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초’(超, sur)가 현실을 뛰어넘어 그 바깥에 놓이는 저항의 결과물을 내는 것이었다면 홍상수의 ‘초’는 결과물로서 주어진 현실을 더 제대로 보기 위해 상투적 방법을 뛰어넘는 과정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둘은 엄연히 지향이 다르다. 때문에 홍상수에게는 다다이스트들에게 그렇게나 중요했던 무작위성이나 자동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대신 구조와 구조로서의 배열, 배열을 생명으로 이끄는 우연이 더 중요하다.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과 같은 뜻이라고 혼동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표현할 때 그 말에는 별거 아닌, 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규정할 수 없는, 이라는 신비에 대한 경외심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아무것도 아닌 것, 그건 차라리 신비의 원석이다. 어쨌거나 나의 억측으로는 홍상수가 말하는 추상과 구상의 완전하고 단단한 합일이라는 지평도,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단단하게 결합해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되는 상태의 일환으로 들린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직을 통해 중요한 무엇이 되는 것, 그러니까 중요한 뜻이 담긴 무엇이 아니라 중요하게 느껴지는 무엇이 되는 것.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영화라는 예술이 해낼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장 미셸 프로동은 홍상수의 영화를 ‘뇌의 영화’라는 개념으로 완벽하게 적용해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어떤 개념적 적용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있는 홍상수의 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는 데 내기를 걸 자신이 있다. 다만 <옥희의 영화>가 문자 그대로 뇌의 완강하고도 활발한 활동의 결과물이라고는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착각이건 아니건 관람차를 보았고 마치 관람차의 활동을 뇌로 얹기를 원한 것처럼 보인 한 다다이스트의 소박한 자화상을 보았고 그 지향적 차이 속에서도 마침내 홍상수와 <옥희의 영화>를 그 우연들이 가리켰을 때, 경이롭기 이를 데 없는 <옥희의 영화>가 홍상수라는 그 살아 있는 창작의 뇌의 활동모형처럼 느껴진 건 사실이다. 홍상수의 머릿속을 돌고 있는 홍상수들, ㅎ, ㅗ, ㅇ, ㅅ, ㅏ, ㅇ, ㅅ, ㅜ들로 되어 있는 관람차의 모형들 또는 다다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짜낸 신비였다.

촬영 당일 시나리오, 촬영 당일 캐스팅

<옥희의 영화>는 제작방식에서조차 홍상수 자신의 골수를 짜내어 만들어졌다. 홍상수는 <하하하>라는 그의 가장 비범한 작품에 속할 영화의 후반작업을 할 때부터 다음 영화 <옥희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서둘렀고 몇 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완성했다. 그는 스스로 몰아쳤다.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물론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있는 건 하나도 없었고 몸도 영화 찍을 몸은 아니었는데 이럴 때 찍으면 어떻게 되나 보자 했다.” 어떻게 되나 보자. 홍상수의 영화는 늘 그렇게 시작한다. <하하하>가 적은 스탭이었다면 <옥희의 영화>는 가혹한 스탭이었다. 감독을 제외한 4인. 감독이 허드렛일까지 하게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현장에 놀러간 사람들은 예외없이 스탭의 일원이 되어야 했고, 스탭의 기억에 따르면 어느 날은 촬영 분량이 끝난 문성근이 잠시 보이지 않아 둘러보았더니, 이 대배우가 부탁도 안 했는데 알아서 저 멀리 서서 차량통제를 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촬영은 감독이 교편을 잡고 있는 건대와 건대 인근, 아차산에서 전부 했고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날 찍게 되면 정말 그날이 영화에 등장했고 100년 만의 폭설이 내렸을 때는 ‘폭설 후’라는 소제목으로 한장이 되었다. 대체로 주중에 2~3회차씩 찍으며 몇주에 걸쳐 13회차에 끝냈는데, 애초에 영화는 이선균만을 주인공으로 정해놓고 찍기 시작했지만 5회차쯤 찍으니 써놓은 걸 다 써버렸고, 그러자 무언가 새로 쓰기 시작했고 문성근에게는 출연 분량을 늘려달라고 부탁했고 정유미에게는 새로 출연을 청했다. 이로써 중편 <첩첩산중>에 출연한 배우들이 다시 출연하게 됐다.

감독은 촬영 당일 아침 6시30분부터 8시까지 촬영대본을 쓰고 전화를 걸어 배우들을 불렀다. 여기서 유의할 건 미리 일정을 약속하고 촬영대본만 당일에 쓴 게 아니라, 촬영대본을 당일 아침에 쓴 다음 배우들과 그날로 일정을 잡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감독이 당일 촬영대본을 쓴 다음 당일에 장소섭외를 하고 당일에 배우를 현장에 불러낸단 말인가. 그것도 구구절절 설명도 없이 이렇게. “유미야, 오늘 뭐 해?”, “성근이 형, 오늘 3시까지 올 수 있어?”, “선균아 요즘 뭐 해?”로 캐스팅을 하더니만 촬영도 그렇게 진행했다. 이런 과정이 해프닝이 아닐뿐더러 홍상수 영화의 변치 않을 연출 원칙인 동시에 신묘한 효과를 가져오는 정교한 과정 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 많은 자리에서 말해져왔으니 더 덧붙일 말은 없고, 덧붙인다면 그가 <옥희의 영화>에서 그 자신의 방식을 어떤 영화보다 더 모험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였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들은 촬영장에서 이 영화가 도대체 어떤 영화가 되어 가는지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홍상수의 다른 영화들도 대체로 그렇지만 이번에는 좀더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평이 없었다(불평이라면 “홍 감독 다 좋은데 하루 전에라도 일정을 알려주면 안될까”라고 했다는 문성근의 부탁 정도?).

그런데 배우들은 왜 불평하지 않았을까. 홍상수가 결코 다다이스트 트리스탕 차라가 선언한 방식으로 창작물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는 그의 무작위 시의 작법에 관해 선언했다. 신문지에서 기사를 오려 가방 안에 넣고 흔든 다음 무작위로 꺼내 다시 오려 붙이면 그게 최선의 무작위 시라고 주장했다. 홍상수가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더 즉흥적으로 <옥희의 영화>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배우들은 결코 무작위로 고른 신문지가 아니다. <옥희의 영화>는 감독과 배우들간의 위대한 감응으로 이뤄져 있다. 홍상수는 우연들을 전부 한통속으로 모아 콜라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우연이 빛나는 순간들을 수긍하는데, 강제된 캐릭터가 없으므로 그날 그들의 기분이 배어 있고 그들이 있는 그곳의 환경이 반영되고 거기에 반응하는 그들이 있다. 그들은 시종일관 철저하게 직접적이고 물질적인 관계망 안에서만 어떤 미지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를 “전염시킨 것”이다. 거기에서 감탄할 만한 이선균의 허허실실이, 절절한 정유미의 간절함이, 깊고 깊은 문성근의 쓸쓸함이 나온다. 이 놀라운 결과는 홍상수의 뇌(추상)의 활동이 마침내 배우라는 신체(구체)를 움직여 일으킨 기적적인 물질의 현시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감독 자신은 뭐라고 할까. “내 영화 중에 가장 이상한 영화”, “내가 보기에 되게 눈이 편한 영화”. 그런 <옥희의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주문을 외울날>

<옥희의 영화> 속 4개의 장은 이렇습니다

<옥희의 영화>는 4개 장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그다지 별다를 것도 없다. 홍상수는 많은 영화에서 일화별 구성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 새파란, 마치 뭔가 잘못된 건 아닌가 생각하기에 딱 알맞은 새파란 화면 위에 소제목과 배우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각각 소제목은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다. 이 장들이 새로 시작될 때마다 등장배우의 크레딧도 새로 등장한다. 하지만 시종일관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이며 순서만 바뀔 뿐이다. 한장이 끝나고 다른 장이 시작될 때에는 어김없이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흐른다.

‘주문을 외울 날’은 영화감독이자 시간강사인 남진구(이선균)의 하루 일과다. 학교에서 남진구는 한 여학생에게 인위적 틀 없이는 순수가 전달될 수 없다고 가르치는데, 그러고 나서는 금방 옆방의 송 선생(문성근)을 만나 돈 때문에 얼룩진 세상에서는 책밖에 믿을 게 없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교수들의 저녁 회식 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다른 교수를 만나 송 선생이 돈을 받고 교수를 시킨다는 소문을 듣는다. 회식자리에서 남진구가 술에 취해 송 선생을 붙들고 그 진위를 묻다가 자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그 다음 저녁에 찾은 자기 영화의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는 예전에 당신과 사귄 애인의 친구라고 자처하는 한 관객에게서 4년 전 불미스러운 연애를 기억하냐는 질책을 받는다. 남진구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키스왕’은 영화과 학생 진구(이선균)가 그를 가르치는 교수 송 선생(문성근)에게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칭찬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잠시 뒤 진구는 같은 과 학생 옥희(정유미)를 만난다. 옥희가 송 선생의 교수실 앞에서 귀를 기울이며 서 있는 것이 수상했지만 한번만 왜 그런지 묻고 그 다음은 잊는다. 옥희와 송 선생은 사귀었거나 사귀는 것 같다. 진구는 옥희에게 사귀자고 하고 길고 긴 키스도 하고 크리스마스 날에는 집까지 찾아간다.

‘폭설 후’에서는 송 선생(문성근)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폭설이 내린 다음날, 수업시간이 20분이나 지났는데 수업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시간강사 송 선생(문성근)은 ‘쪽팔려서 이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침 만난 교수에게 다음 학기부터 영화 찍느라 못 나오겠다고 말한다. 폭설을 뚫고 옥희(정유미)가 도착하고 뒤이어 진구(이선균)가 도착한다(송 선생은 옥희를 볼 때는 “아 옥희구나” 하고 고마워하더니 진구를 볼 때는 “새끼, 빨리도 온다” 하고 퉁명을 떤다). 강의실에서 옥희와 진구가 묻고 싶은 걸 묻고 송 선생이 자기 생각을 대답한다. 선생님은 성욕을 어떻게 이기세요, 누가 성욕을 이긴대? 그런 사람 본 적이나 있어? 이런 문답이 오간다. 낙지집에 갔다 나오며 송 선생이 “그만두길 잘했어. 나는 자격 없어”라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그가 눈 바닥에 세발낙지 한 마리를 통째로 토한다.

‘옥희의 영화’는 영화 속 영화이고, 옥희로 예상되는 젊은 여자(정유미)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나이든 분(문성근)과 젊은 남자(이선균)와 한 차례씩 아차산에 올랐던 연애 경험을 교차시켜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이 부분은 영화 속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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