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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태어나줘서 고마워
윤성호(영화감독) 2010-09-17

조카를 위한 삼촌의 동화작가 코스프레

동생이 아이를 낳았다. 산모는 늠름하고 아기는 꼬물꼬물. 아유, 감사해라. 출생 기념으로 오글오글 동화작가 코스프레. 삼촌 소리는 많이 들어봤으니 글에서나마 괜히 한번 이모 코스프레.

인이와 토마토 이모

이모는 인이의 이모인데, 원래 다른 이름이 있지만, 인이는 이모를 그냥 이모라고 하거나, 작은 이모라고 부른다. 이모는 인이 엄마의 동생인데, 인이 엄마는 또 인이 엄마 언니의 동생이기 때문에, 엄마는 엄마이고 이모는 작은 이모이고, 엄마의 언니는 큰 이모이다. “아유, 간단하다”라고 엄마가 말했지만, 인이는 생각한다. ‘아유, 간단하지 않다.’

간단한 사실도 있는데, 인이가 인이의 이모, 그러니까 같이 사는 작은 이모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간단하다. 그래서 인이는 작은 이모를 부를 땐 가끔 보는 큰 이모를 부를 때와는 달리 “이모~”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큰 이모를 부를 때도 “이모”라고 부르지만, 그 느낌은 “이모-”에 가깝다. 이모도 조카인 인이를 좋아하는데, 5년 전에 인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인이를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고 한다. 이모는 그런 식으로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들이 많다. 가끔 이모가 엄마랑 얘기할 때 하는 말인데, 이모는 언니 집에서 지내게 될 줄 몰랐고, 지금껏 결혼을 안 할 줄 몰랐고, 다니는 회사가 없을 줄 몰랐다고 한다. 회사가 뭐냐고 물으며 인이가 끼어들자, 인이의 엄마가 대답하길, (참, 인이의 엄마는 엄마인데도 개구쟁이다!)

“응, 회사는, 사람들이 돈을 만들어오는 곳이야,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종이도 자르고 그림도 그려서 돈을 만들어, 인이야.” “자 대고 잘라?” “응, 자 대고 잘라서 연필로 그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인이는 신이 난다. 하하하, 그럼 아빠도 종이를 자르고, 엄마도 종이를 자르는구나. 아빠도 연필로 그리고, 엄마도 연필로 그리는구나!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이모는 신이 나지 않는다. 아이 참, 언니는 인이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애가 잘못된 상식을 갖게 되잖아. 그건 좀 그렇잖아. “아유, 그건 정말 그렇네” 하면서 인이 엄마는 일을 나간다. 그런데 많이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게 인이도 엄마가 돈을 자르고 붙이는 게 아닌 건 안다. 인이랑 이모랑, 인이 엄마가 일하는 곳에 가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엄마가 힘이 센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하는 데 방해하면 안되니까 엄마 일하는 데 가까이 가진 않았다. 그러니까,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슈퍼마켓에서 일을 하는데, 앞에 조그만 문이 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데, 바구니를 들거나 밀면서 서 있는데, 엄마가 컴퓨터를 삑삑삑 누르고 서랍을 탁탁탁 여는데, 그러고 나서 엄마가 허락을 하면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는데, 그런 문이 여러 개 있는데, 그건 마치 지하철과도 같다! 인이는 지하철 놀이를 좋아하는데, 지하철 놀이가 뭐냐면 대공원 갈 때 지하철을 타봤는데, 기차랑 승강장 사이에 발이 빠질 뻔했는데, 그래서 아빠가 놀라서는 그런 틈을 폴짝 뛰어넘는 놀이를 틈틈이 시키는데 ‘이건 훈련이다’라고 아빠가 말했지만, 재밌으니까 놀이이다, 폴짝.

폴짝거리다가 재미가 없어지면 인이는 이모 옆으로 간다. 이모는 컴퓨터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하나도 졸지 않은 척한다(이모의 컴퓨터는 엄마가 일하는 곳에서 삑삑 누르는 컴퓨터랑은 다르다). 그러면 인이는 토마토 놀이를 하기 시작한다. 토마토 놀이는 토마토 이야기를 하는 놀이인데, 그러니까 인이가

“토마토, 토마토 주스될 거야~” 이러면, 이모가 호호호 웃는다. “토마토, 토마토 케첩될 거야~” 이래도, 이모가 히히히 웃는다. 그러면 인이가 신나서 연달아 외친다. “토마토, 토마토 주스될 거야~ 토마토, 토마토 케첩될 거야~” 인이는 여기서 잠시 멈춘다. 왜 멈추냐면 그 다음 토마토로 무엇이 될지는 인이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이모도 인이 앞에서 생각을 해본다(생각을 안 하는 척하면서 생각을 하는데, 이럴 때 이모의 입술은 오므려지고 코는 좀 벌어진다).

‘토마토, 토마토, 공격대될 거야~’라는 말이 이모의 입술과 코 사이에서 생각난다. 그러니까 ‘토마토 공격대’는 예전에- 이모가 아직 학생이고, 시간이 지나면 세상 모든 일이 잘 풀려서 일과 사랑과 쉬는 시간과 간식거리와 이상한 제목의 영화들이 자연스레 책상 앞에 놓여 있게 될 줄 알았을 때- 봤던 미국영화의 제목인데, 커다란 토마토들이 화가 잔뜩 나서 이 거리 저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는 내용이다. 여기서 다시 이모는 생각한다. ‘토마토 공격대로 운율을 받아도 될까?’, ‘공격대는 네살짜리 애한테 좀 무리한 단어가 아닐까?’, ‘공격이란 말을 배우게 되면 애가 공격적이 되지 않을까?’, ‘아, 그런데 내가 왜 지금 이런 생각에 빠져 있지?’, ‘영화를 계속할걸 그랬어’, ‘아니야, 나는 취직을 하고 어디엔가 소속이 되어야 해’, ‘그 사람도 내 생각을 할까?’ 이모의 입술이 더 오므려지고 코는 더 벌어지고 이제 눈 옆의 살에까지 힘이 들어갈 때쯤 인이의 노래가 이어진다.

“토마토, 토마토 춤을 출 거야~ 토마토, 토마토 춤을 출 거야~.”

아, 그렇구나, 토마토 춤이 있었구나, 토마토는 원래 영어니까 춤만 영어로 바꿔서 토마토 댄스! 잠깐 얼굴이 밝아지는 이모. 이미 얼굴이 밝아져 있는 인이. ‘근데 토마토 주스와 토마토 케첩을 이어받으려면 토마토는 역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모는 딱 2초 동안 더 하고 관둔다. 왜냐하면 인이가 춤을 추고 있는데, 그건 토마토 춤이기 때문이고, 토마토 춤은 옆에서 도와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건 꼭 농부들한테 물어보지 않아도 다들 아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인이가 춤을 춘다. 엉덩이를 왼쪽으로 밀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밀었다가, 주먹은 예쁘게 쥐고- 인이 나이면 주먹을 쥐어도 예쁘게 쥘 수가 있다!- 발은 깨금발을 하고 “토마토, 토마토 춤을 출 거야~ 토마토, 토마토 춤을 출 거야~”.

이모도 그런 인이 옆에서 설렁설렁 춤을 춘다. 영어로 하면 설렁설렁 댄스인데 한명이 추면 다른 한명도 따라서 추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조그만 목소리로 설렁설렁~ 을 중얼거리며 어깨를 좁히고 무릎은 굽혔다 폈다 굽혔다 폈다 “토마토, 토마토 춤을 출 거야~(설렁설렁~ 설렁설렁~) 토마토, 토마토 춤을 출 거야~(설렁설렁~ 설렁설렁~).”

이게 왜 토마토 춤이냐면 세상의 어떤 토마토들이 틈날 때마다 그렇게 춤을 추기 때문이다. 설렁설렁 춤을 추다 이모가 괜히 쑥스러워하며 동작을 멈추려 하면 인이가 웃으며 이모에게 엉덩이를 흔들어댄다. 계속해요, 이모, 계속 춰요, 이모. 토마토가 꼭 뭐가 될 필요는 없잖아요, 꼭 주스가 되고 케첩이 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그럴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이모, 작은 이모, 토마토 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