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와 강풍이 휩쓸고 간 다음날 집 밖을 나서니 뿌리째 뽑혀 쓰러진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수도권 아파트 단지가 이 정도이니 그외 지역은 말해 무엇하랴. 북한도 이번 태풍에 노출됐다고 한다. 얼마나 또 굶어죽으려고… 혼잣말을 하다 놀랐다. 이런 말만 늘어놓는 것조차 배우 김여진씨의 말대로 “굉장히 잔인하고 무심한 행동” 같다. (그 연령대로 그만한 ‘내공’을 보여준 이가 드문데 어느 틈에 브라운관에서 볼 수 없게 됐다. 그녀는 요즘 대북 지원활동에 열심이다. 최저생계비 체험에 나섰던 ‘삼순이 아버지’도 그렇고 요즘 ‘개념 배우들’은 브라운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많이 본다.)
북한은 반복된 홍수 피해에 배급도 끊긴 상태인 걸로 알려졌다. 유엔 세계식량기구는 북한을 ‘긴급 식량 지원국가’로 지정하며 올해에도 110만t의 식량이 부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수십만 아사자가 아니라 수백만 아사자가 나올지 모른다. 이런 나라는 아시아에서 북한밖에 없다. ‘굶어죽는 것’은 못 먹어 발육이 부진하고 병에 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상상으로 가장 끔찍한 일이다.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는 현실을 외면하고 김정일 욕만 하는 건 그 현실을 볼모로 봉쇄 정책을 펴는 것 못지않게 잔인하다.
올해 추수 전까지 국내 쌀 재고량은 149만t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쌀은 넘쳐나고 쌀값은 폭락하고 남아도는 쌀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비로만 다시 연간 수천억원이 쓰이고 있다. 그나마 국내 수급량을 맞추는 데 기여하던 대북 쌀 지원도 지난 2년 동안 전면 중단되어 매년 40만t씩 고스란히 쌓여가고 있다. 해마다 늘어나는 의무수입량까지 더해지면 재고량은 셈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거듭되는 쌀값 폭락으로 국내 농가는뿌리째 뽑힐 위기에 처했다.
정부는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통일쌀 보내기 국민운동본부’가 반출신청을 한 쌀 100t에 대해 “남북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승인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쌀 지원 절대 불가’에서 완화된 태도를 보이는 것이,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열린 자세를 세계에 과시하는 효과”(김덕룡 민화협 의장)를 위해서는 아니길 바란다. 국내 농가도 살리고, 최악으로 치닫는 남북 경색도 풀고, 북한 주민도 구제하는 것만큼 ‘남북상황을 종합적으로’ 만족시키는 게 또 있을까. 그 쌀로 지은 밥이 세상에서 가장 배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