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엘 시스테마의 열정적인 합주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
이영진 2010-08-11

‘베네수엘라 사우디타’(Venezuela Saudita). 1970년대 베네수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석유 부국을 꿈꿨다. 마라카이보 호(湖)에서 솟아난 석유는 분명한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다. 1975년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페레스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지휘도를 수여받은 우고 차베스 역시 조국의 번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16년 뒤 페레스 대통령과 미국과 초국적 기업을 향해 칼을 빼들 반역의 주인공이 될 줄 몰랐을 것이다.

누구나 장밋빛 미래를 말하던 시기, 불가능한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에 베네수엘라는 탐욕스러운 제국들의 좋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그들의 귀에 민중의 신음과 통탄은 그치지 않았다. 1975년 엘 시스테마는 그렇게 탄생했다. “우린 예술로 싸웁니다. 자라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음악이라는 기치 아래 하나가 되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거죠.” 엘 시스테마가 택한 건 총 대신 음악이었다.

엘 시스테마의 공식 명칭은 베네수엘라 국립 청년 및 유소년 오케스트라 시스템 육성재단이다. 흔히 시스템을 뜻하는 ‘엘 시스테마’라 줄여 부른다. 가난은 당장 처치할 수 없지만, 조금씩 치유할 순 있다. 빈민가에서 마약과 총으로 허기를 달래던 아이들에게 엘 시스테마는 든든한 요새이자 꿈의 요람이다. 전과 기록으로 얼룩진 11명의 아이들로 시작한 엘 시스테마는 현재 100여개의 지역별 오케스트라와 30만명의 단원을 거느린 초대형 오케스트라가 됐다.

역경에서 환희를 쏘아올린 엘 시스테마의 기적을 다룬 이 음악 다큐멘터리는 특별한 재능이 기적을 일구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모차르트의 부활이라는 찬사를 받는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또한 엘 시스테마의 일원으로만 다뤄진다. 대신 종이로 만든 바이올린을 만지작거리던 코흘리개들이 어떻게 세계가 주목하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한명의 불우한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모든 불우한 아이들도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죠.” 엘 시스테마의 창립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오의 말처럼, 엘 시스테마의 철학은 누구에게나 평등이다. 마에스트로와 비르투오소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음악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엘 시스테마의 이념은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는 스탭들의 확신에 찬 발언과 총을 맞고서도 웃으며 연주를 했다는 소녀의 진지한 표정에서도 읽힌다.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가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설교하는 건 아니다. 음악 다큐멘터리로서의 본연의 감동도 있다. “여기 아이들은 열다섯이면 총 들고 마약하다가 3달 뒤엔 죽고 말아요”라는 꼬마의 말이 끝나면 버려진 아이들의 고난의 여정을 다룬 모리스 라벨의 <라프니스와 클로에>가 흘러나오고 젊은이들만이 새 세상을 열 수 있다는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오의 인터뷰에 이어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정교한 구성보다 당장 눈과 귀를 사로잡는 건 엘 시스테마의 열정적인 합주다. 엘 시스테마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시몬 볼리바르의 <맘보> 연주는 어떤 뮤지컬보다도 흥겹고 어느 재즈 공연 못지않게 자유롭다. 연주 도중 파트별로 일어나 소리를 지르거나 무거운 관악기를 휘리릭 손으로 돌리는 대목에선 지켜보는 이의 엉덩이도 저절로 들썩거린다. 악기가 없어도 연주할 줄 아는 꼬마 오케스트라와 들리지 않아도 노래할 줄 아는 장애인 합창단의 감동도 빼놓을 수 없다.

덧붙여 엘 시스테마의 기적을 좀더 보고 듣고 싶다면 국내 출시된 DVD <The Promise of MUSIC>이나 음반 <<Fiesta>>를 권한다. <The Promise of MUSIC>에도 엘 시스테마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포함되어 있는데 또 다른 환희의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Fiesta>에는 남미 클래식 작곡가들의 음악으로 제 영혼을 연주하는 엘 시스테마를 들을 수 있다. 또한 책 <민중의 호민관 차베스>에는 차베스 혹은 엘 시스테마의 정신적 지주인 시몬 볼리바르, 시몬 로드리게스 등과 같은 전설적인 영웅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