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학번인 내가 분포된 나이 띠 근방의 사람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란 이름에 비슷한 감정을 품지 않을까? 그러니 만인의 우상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게 참 부끄럽다. 그 이름에 누가 될 텐데 이거 참…. 그러나 이런 소심한 사람을 용기내게 만든 게 바로 그이다. 그의 고백이다.
그는 고백한다. 소설을 시작할 때 앞일을 모르고 출발한다고. 대충의 도착지만 있을 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여행. 그런데 그렇게 나온 글이 때로 자신을 앞질러 있기도 하단다. 비슷한 고백이 하나 더 있다. 그가 번역해준 레이먼드 카버의 <글쓰기에 대하여>에 나오는 고백이다.
‘첫 문장을 쓴다. 그러나 그 다음 문장이 무엇이 될지 모른다.’ 이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가 대학교 4학년이었다. 앞으로 뭘 하며 먹고살지 세상은 넓고 자신은 극도로 초라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내게 이 말은 구원의 메시지였다. 서점에 가득 깔린 책이나 넘쳐나는 영화 포스터만 봐도 기가 죽었다. ‘와~ 세상엔 참 똑똑한 사람들이 많구나. 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DNA를 타고난 걸까? 대체 나 같은 인간은 어떻게 살라는 걸까?’ 그저 부러움과 열등감으로 턱이 빠지던 나는 그들의 단순한 고백 몇줄에 정신이 번쩍 났다. ‘어이! 숨부터 쉬세요, 하나~ 둘~, 아니 이 등 좀 봐라 이거, 탁~!’ 쭉 빠졌던 턱이 제자리로 오고 풀렸던 눈이 초점을 맞추며 내 운동화 코끝을 봤다. 아휴 뭔진 몰라도 나부터 보라는 모양이구나. 감사합니다. 걷기 시작했다. 계속 걸었고, 지금도 내 운동화 코끝을 보고 걷는다.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다>를 보니 ‘커미트먼트’란 말이 무지 많이 나온다. 어렵긴 한데 <태엽 감는 새>에 나오는 ‘우물파기’와 비슷했다. 내 우물 안으로 기어 내려가 죽치고 앉아 기다리다가 안 열리는 문이 열리는 걸 경험하는 것. 드라마 연출로 흥하고 망하는 경험을 해보니 이제 내 우물 밑으로 간절히 내려가고 싶다. 내 안의 닫힌 문을 열고 세상을 만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이분도 그 방법을 모른다고 하신다. 그래서 소설 쓰기를 계속 하며, 기다린다고 하신다. 아아~ 소설에 답을 냈다고 인생의 답을 낸 게 아니구나. 위로가 된다. 지금 다시 내 등을 쳐주신다.
집에 놓여 있는 그의 책들을 보니 알록달록 갖가지다. 죽 손가락으로 훑으며 무슨 내용이었는지 떠올린다. 잘 생각나지 않는 게 많다. 읽고 나서 거의 까먹은 걸 읽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언뜻 떠오르는 건 이런 것들이다. 달리기, 와인과 푸짐한 요리, 음악, 특히 재즈, 외국 풍경, 고양이, 그리고 소설 안에 있었던 인물들, 어려웠던 세계, 이상한 모험, 아프고 힘들었던 통과지점.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매번 비슷한 다짐을 했다. 그가 이토록 대단한 걸 던져주는데 독자 함량이 부족한 관계로 다 줍지 못했으니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다시 주워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에 비해 수필은 쉬웠다. 그를 엿보는 재밌는 구멍이었다. 대체 어떻게 사는 사람이기에 이런 소설을 쓰는 걸까. 아아, 멋진 음악을 들으며 매일 조깅을 하고 와인을 마구 퍼마셔도 끄떡없으신 체력에 요리도 잘하시는 구나. 멋진 천재. 이렇게 이해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의 책 앞에 붙은 사진이 청년에서 중년남으로 바뀌었을 때, 그가 헤밍웨이를 두고 오늘 더 쓰고 싶을 때 내일을 위해 펜을 내려놓는 위대한 작가로 칭송할 때 깨달았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 조깅을 하고, 글쓰기를 해왔다. <내가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온 중년남 하루키 뒤태를 보면 매우 놀랍다. 갈색의 가느다란 근육이 세로로 아름답게 뻗어 있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그의 글에서 그보다 더한 근육이 보인다. 그는 어쩌면 내가 20대에 믿었듯이 하늘에서 툭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서랍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숨겨두고 날마다 엉덩이에 땀나도록 글을 써대는 무섭고 지독한 작가인지 모른다. 아, 천재는 단명한다고 하는데…. 난 다시 더더욱 위대해진 인물 초상화 앞에 선 관객이 된다. 내 운동화 끝을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