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루키를 처음 읽은 것은 스무살 때였다. 1990년대였다. 386세대가 뜨겁게 청춘을 산 다음의, 스무살. 이념과 투쟁에의 부담감은 어느 정도 사라진 뒤였고, ‘신세대’라는 신조어가 내 또래를 지칭할 즈음이었다. 스무살의 나는 막걸리 대신 생맥주를 마셨고, 세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록카페에서 서태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즐거웠다. 하지만 어쩐지 좀 먹먹하고 헛헛했다. 개인주의까지는 좋은데 그래서 과연 그게 무엇인지, 실체를 몰랐다. 정작 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스무살을 규정해줄 ‘말’이 없었고 ‘코드’가 없었다. 그런 시절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절묘했고 적절했다. 뜨겁지 않아도, 차가운 방식으로도 죄책감없이 세상을 살 수 있는 거라는, 어떤 선배의 고마운 전언 같았달까. 그의 책에는 가장 사적이고 사소한 영역에 대한 찬사가 있었다. 집단이 아닌 개인이, 그 자체로 충분히 값지고 빛날 수 있다는 예시가 있었다. 그렇게, 이념의 공백을 시나브로 채워가며 하루키를 읽어나갔다. 마라톤과 재즈, 미국과 야구, 비틀스와 다리미, 치즈케이크와 도넛, 한밤의 택시와 고양이, 동물원과 코끼리…. 다분히 ‘하루키적’ 아이콘 사이에서 느슨한 포물선을 그리며, 90년대 당시 스무살의 공기가 그렇게 형성되었다.
내 세대가 통째로 하루키를 읽고 소비하던 시절이었다, 비슷한 연유였을 거라 짐작한다. 단순한 문학을 넘어 하루키적 삶의 방식에 대한 동경과 집착이 저마다 있었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듣고, 누리려 하고, 생각하려 하고, 말하려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돌이켜보면 관자놀이 주변을 연신 긁어댈 수밖에 없을 만큼 멋쩍고 우직한 소비 패턴들이었지만, 그만큼 풋풋했던 시대였다고, 대신 말하겠다. 그 특정한 시기 이후, 숱하게 많은 문학과 영화 드라마, 가요에서 ‘하루키적’ 아이콘은 반복 소비되고 인용되고 영향을 주었다. 그러는 사이, ‘하루키 키드였다’는 커밍아웃에는 일정 정도의 용기가 필요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게 스무살은 태양계 횡단 정도는 해야 겨우 닿을, 까마득한 옛날이다. 더이상 “이 행성은 사람들의 적막감을 자양분 삼아 회전을 계속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식의 하루키적‘정서는 내게 유효하지 않다. “뇌수가 다 녹아버릴 만큼의 섹스”같은 식의 표현도, 로망도, 그닥 와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21세기 현재의 내게, 하루키는 어떤 의미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실로 오랜만에 책장에서 하루키의 책들을 꺼내본다. 후루룩 넘기다 보니. 얇은 단편집 제일 마지막 편에 시선이 문득 멈춘다. 이렇게 써 있다.
아침부터 라면의 노래 (전략)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 마른 죽순 모닝/ 아침부터 라면, 아이 좋아라/ 그대와 둘이서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이것만 있으면 마이 브라더즈 앤 마이 시스터즈 이젠 만족 안 먹으면 손해/ 라면 인 더 모닝 (후략) 근사하구나. 하하하하하하하하. 여전히. 하하하하하하하. 안 먹으면 손해, 라면 인 더 모닝(사실은 새벽)이나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