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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무한과 꿈의 원더랜드
2010-08-12

무라카미 하루키와 환상성

한때 꿈 이야기를 올리는 커뮤니티를 운영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 만큼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근심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낮 동안 충분히 열심히 살지 않아서라고도 한다. 이유야 어쨌건 많은 양의 꿈을 ‘다작’하다 보니 때로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어제(이 원고청탁을 받고 나서 며칠 뒤에) 꾼 꿈을 가감없이 적어보자면 이렇다.

나는 관처럼 생긴 수조에 반듯하게 누워 있다. 사람들은 어떤 시기가 되면(혹은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면) 다음 세대를 위하여 의무적으로 삶을 마감하도록 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고, 지금은 나의 차례였다. 나는 살짝 초조했으며,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한편으로는 약간의 뿌듯함을 동반한 일종의 윤리적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세대간 재분배와 관련한 어떤 경제이론을 떠올린 것도 같은데, 그것이 꿈속에서였는지 깨어난 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들을 수 있을 법한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절차를 안내하는 여자 성우의 친절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제 곧 물이 차오를 것입니다.” 그냥 물은 아닌 것 같은, 점도가 높은 투명한 액체가 점점 수조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절차를 안내하던 음성은 이제 영혼의 평화를 기원한다는 등의 복된 말들을 읊어주고 있었다. 이윽고 액체가 호흡기로 흘러들어오고, 내가 살짝 당황하는 사이에 나의 육체는 간단히 작동을 멈추었다. 액체의 특수한 성분 때문인지 혹은 다른 어떤 첨단기술의 덕분인지, 끝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적어놓고 보니 꿈의 분위기 자체는 커트 보네거트에 더 가까웠던 것 같긴 하지만, 이 꿈은, 아니 꿈이 갖고 있는 어떤 속성은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환상성과 긴밀하게 닮아 있다.

위의 꿈을 꾸는 데 소요된 물리적 시간은 길게 잡아봐야 한두 시간. 어젠 유난히 많은 꿈들을 꾸느라 바빴으니 실제론 아마 그보다 더 짧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단순히 그 시간 분량만큼의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꿈이 시작하는 그 순간, 나는 이미 그 안에서 완결되어 있는 하나의 세계와 만난다. 난 지금이라도 그 꿈속의 세계에 대해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다. 개인에게 할당되는 에너지와 자원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엄격히 한정되어 있으며, 애국심 같은 것 대신 ‘엔트로피’의 윤리가 지배하는 어떤 세계. 만일 꿈을 역탐색해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세계의 우주가 탄생하던 태초의 순간으로까지도 되짚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π(파이) 같은 무리수의 성질과 비슷하다. 우리가 비록 3.141592 정도의 앞자리 몇개 숫자만 보고 기억할 뿐일지라도 사실 π는 그 안에 무한히 이어지는 숫자들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어떤 원리를 갖고 완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이쑤시개 하나에 백과사전을 기록하는 법’에 관한 대화를 통해 이런 개념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곧 그 소설과 이야기의 구조에 대한 직접적 설명이기도 하다. 이는 무척 의미심장하다. 소설이 (혹은 예술이) 한정된 물리적 매체 안에 무한을 새겨넣는 작업이며, 그러한 방법론적 자각을 통해 이 이야기가 쓰여졌음을, 소설 속에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 문학의 환상성은, 소설의 내적 완결성에 대한 적극적인 실험으로 그가 택한 방법론처럼 보인다. 현실 세계라는 일종의 템플릿(template)을 복제한 뒤 몇 가지 설정을 임의로 조정하면, 소설 속 세계는 그가 비틀어놓은 설정들을 모순없이 포용하기 위해 스스로를 수정하고, 다시 이를 피드백하여 무결성을 검사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새로운 하나의 세계로 수렴해간다. 그것은 합리적이기보다 자의적이며, 그러나 여전히 내부적으로 완결된 논리(consistency)를 갖춘 세계, 마술적이지도 스펙터클하지도 않고, 그저 기이한 일과 당연한 일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바꾸고는 시치미를 떼는 세계다.

하루키 소설 속의 환상적·초현실적 요소들은 굳이 어떤 알레고리로 해석하지 않는 편이 내겐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임의적 매핑이다. 나의 숱한 꿈들이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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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이언 미디어아티스트/뮤지션, 밴드 못[M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