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상실의 시대>를 읽은 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나는 아직 불이 켜 있던 아파트의 불이 꺼지던 순간을 지켜보다가 뒤돌아서던 발길 같은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불빛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에게 삶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을까? 앞날이 마치 불빛이 꺼진 아파트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때도 아파트와 도시와 곧 가버릴 청춘을 육체의 눈이 아닌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을까? 거대한 것들의 시대는 갔고, 영웅과 모험과 혁명과 열렬한 논쟁과 모색의 시대도 갔고, 세상은 가볍고 변덕스럽고, 반짝거리되 찬란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의 열정과 소망과 성취 역시 작아졌을 때 그때도 우리는 무의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그때도 또다시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란 것을 입 밖으로 내 물어보아야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상실감의 시대에 뜻밖의 방식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건 새로운 처세술의 등장과도 같았다. 매달리지 않으면서 연애하고 예의를 지켜 섹스하고 감상적으로 자포자기하지 않으면서,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냉정하면서도 타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고, 속물이 되지도 존재를 내세우지도 않으면서 세련된 문화적 취향을 갖고, 세상에 절규하지 않으면서도 내부의 빈 공간을 서둘러 무의미로 채우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마셔버린 맥주, 피워버린 담배, 싱거운 농담을 마치 순수와 뒤섞인 상실의 풍경으로 보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격렬한 비애감이나 환멸이나 타락이 없는 그의 그런 상실 앞에 위안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런 위안은 우리의 지평선을 확장시켜주는 위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런 위안은 다른 가능한 세상에 대한 아플 정도의 갈망 없이,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게 만들고 결국 뭔가에 대한 회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외는 언제 생길까? 세계가 오로지 내 안에만 존재할 때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1969년 혹은 1973년, 1984년은 역시 아무래도 좋은 해이지 않을까?
<상실의 시대> 이후 일본 경제의 거품은 꺼졌고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사건, 고베 대지진 등이 터졌다. 하루키는 고베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앞으로 앞으로’를 외치던 시대가 퇴색하고 일본이란 나라의 존재 방식이 심각하게 문제되던 시기에 터졌던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1Q84>에는 자신이 어떤 사회에 속해 있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는 두 남녀 주인공이 나온다. 자기가 속한 시스템을 의심하는 두 남녀 주인공의 굳게 잡은 손의 기억이 소설을 끌고 간다.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은 모두 가짜라는 노래가 낮게 깔린다. 그렇다면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아직 정체가 확실치 않은 적인 리틀 피플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상한 구호를 외치며 마치 일곱 난쟁이처럼 실을 자아 공기번데기를 만드는 리틀 피플의 말없고 기계적인 노동은 섬뜩하고 불길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이름이 없고 질문이 없다.
하루키는 <1Q84>에서 1984년은 어떤 해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실의 시대에서 위안을 받던 그 시절의 나 역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그 사이에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