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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선한 아버지의 빈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2]

‘아버지는 진정 죽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잠시 미루고 유해국에 대해 먼저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지난 삶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를 지배하는 것은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라는 맹목적인 질문이다. 아버지와의 어떤 기억도 없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만 남아 있는 이 아들이 그 죽음의 배후에 목숨을 걸고 집착하는 광경은 당연히 의아하다. 그 이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것이 영화의 결함이라고 누군가 지적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런데 유해국의 질문을 살짝 비틀면 이런 생각도 가능하다. 그는 지금 아버지의 죽음의 배후를 묻는 게 아니라, ‘아버지는 진정 죽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마을의 남자들은 유해국을 보며 마치 유목형이 돌아온 것 같다고 경계한다. 이건 농담 혹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다. 유목형은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지만, 유해국은 더욱 강력한 이름으로 귀환한 아버지다. 그 자신이 돌아온 아버지가 된 유해국. 아버지의 유령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음을 느끼는 그는 죽은 아버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와 싸우는 중이다. 마을 남자들의 이상한 경계심과 이영지의 무언가를 감춘 듯한 시선을 받을 때 유해국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것이다. ‘죽은 아버지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건가?’ 질문은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돌아오고 답은 애초 불가능하거나 찾기 어렵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유해국의 긴박한 행로가 매번 공허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하거나, 그의 힘이 아닌 다른 무엇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의 싸움을, 당신은 당신의 싸움을.” 영화의 후반, 영지가 자신의 과거와 유목형의 과거를 유해국에게 고백하며 한 말이다. 만약 유해국의 싸움이(비록 영지가 의도한 싸움이 아닐지라도) 죽은 아버지와의 싸움이라면, 영지의 싸움은 무엇일까. 영지가 천용덕을 비롯해 마을 남자들에게 몸을 준 것이 그녀로서 절박한 싸움이었다면 그 싸움이 무엇에 대항한,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 중간 중간에 암시되긴 하지만, 후반에 밝혀진 바로는 영지는 마을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자다. 그러나 그녀의 싸움은 이상하다. 천용덕을 중심으로 얽힌 공동체의 구조, 그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폭력이 문제라면, 그녀는 직접 문제와 대면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법)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쁜 아버지의 질서를 균열할 수 있는 착한 아버지의 법. 그러나 유 선생은 이미 상징적으로, 그 다음에는 생물학적으로 죽은 아버지다. 그렇다면 이 선한 아버지의 빈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엄밀히 말해, 영지의 싸움은 무기력한 아버지 유목형 개인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때 그녀를 구원했다고 믿었던 선한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여기서 방점은 구체적인 아버지 개인이 아니라, ‘선한’ 아버지의 ‘자리’다. 그 빈자리는 이제 누가 채울 것인가?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영지는 큰 타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녀는 구원이 곧 복수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그녀는 선한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환상 속에서 버티기 위해 싸우고 있다. 나쁜 아버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한 아버지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싸운다. 영지에게 천용덕이 그 자리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적 스펙터클의 불편함

그 싸움의 끝이 <이끼>가 야심차게 치달은 결론 혹은 반전일 것이다. 거기 도달하기 전에 우선, 유목형과 천용덕이 이룬 공동체가 좀 이상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 마을의 구성원은 유목형, 천용덕, 이영지, 전석만, 하성규, 김덕천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살고 있겠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건 이 마을이 생길 때부터 함께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한 가족처럼 보일지언정 아무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 영지를 중심으로 이상한 관계가 형성되기는 해도, 그건 오히려 일반적인 가족의 형태를 거부하는, 심지어는 망각한 행동처럼 보인다. 이 공동체는 오직 한 세대의 것이며,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는 물론 미래에서도 폐쇄되어 있다. 이들이 늙어 죽는 순간, 이 공동체는 끝날 것이다. 세습적 욕망이 없는 공동체. 그렇다면 천용덕이 축적한 그 자본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결국 어디로 가게 될까.

물론 그에게는 경찰관 아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는 아들이기보다는 충실한 하인처럼 보이며, 천용덕 역시 그를 자신의 권력을 승계할 아들로 여긴다고 보기 어렵다. 차라리 천용덕이 과거를 말소시켜주고 다시 태어나게 해준 전석만, 하성규, 김덕천이 그의 아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들 역시 아버지의 인정을 기다리는 아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공동체에서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인정 투쟁은 별반 중요하지 않게 다뤄지거나 아들 자신이 미룬다. 이를테면 공동체의 또 다른 아버지인 유목형이 전석만에게 이제 죄를 다 씻은 것 같으니, 하고 싶은 걸 말해보라고 하자, 전석만은 유목형의 그런 인정을 원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인정은 오히려 아들을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한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인정을 욕망하기보다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저 이대로 살고 싶어 할 뿐이다. 이 아버지들이 전석만, 하성규, 김덕천을 ‘돌아갈 수 없는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구원하기로 했을 때, 그건 이들을 사회적 인간으로 다시 살게 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사회 밖의 인간으로 살게 한 것이다.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대신, 그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인간으로 만든 셈이다. 과거의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사회적 괴물이었던 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이들은 여전히 사회의 타자 괴물이다. 그런데 <이끼>가 그 괴물성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에는 분명 불편한 구석이 있다. 영화가 그들의 괴물성을 그들이 서 있는 토대, 그것을 야기한 맥락과 함께 말하지 않고, 오직 괴물성의 스펙터클을 소비하기 위해 삽입했다는 의심이 들어서다. 요컨대, 전석만이 직감으로 집에 돌아와 유해국에게 돌진하는 타이밍은 서사적 설득력이 없고 그저 잔인하다. 많은 평자들이 찬사를 보낸 김덕천의 광기 섞인 고백도 음울하게 쌓이던 에너지가 폭발한다기보다는 영화적 전시를 위해 그저 거기 던져져 있다는 느낌에 가깝다. 무엇보다 사창가의 감옥에 갇힌 여성들이 불타는 장면은 타자의 고통을 별다른 맥락 없이 영화적 스펙터클로 전시했다는 비난과 더불어 하성규의 괴물성 또한 그저 개별 인간의 악한 본성으로 축소, 혹은 환원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건 영화적 안이함뿐만 아니라, 영화의 윤리적인 무심함과도 관련된 문제다.

그 시선의 끝에 있는 영지에 대한 의문

어쨌든 유목형이 무서운 인간이라면 사회와 차단된 인간의 온전한 교화라는 환상을 품은 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천용덕이 무서운 인간이라면 그의 공동체가 세대의 연속성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 여러 번 밝히듯, 이 공동체의 시작과 끝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자다. 달리 말해, 그는 자신의 왕국이 영원하길 바라는 자가 아니다. 그는 끝을 향해 파국으로 치닫는 자신의 왕국을 응시하는 저 무시무시한 향락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가 축적하고 또 축적하는 자본은 그 누구, 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는 자본이다. 그러니 이 공동체는 시작부터 끝이 예견된 것이다. 이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여기서 우리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 이영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녀가 더이상 유목형도, 이 공동체도 자신을 구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왜 떠나지 않았는지 한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녀가 천용덕의 왕국이 언젠가 끝날 것을 예견하고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꾸몄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석만, 하성규, 김덕천과 마찬가지로 이영지는 사회 안에서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존재다. 세 남자가 법적 처벌을 피해 사회를 등졌다면, 영지는 그녀의 지난 삶을 돌이켜볼 때, 법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회로 돌아갈 수 없는 자다. 그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지금 자신이 사는 땅을 새롭게 만들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그대로 믿는다면, 유해국을 이 마을로 불러들인 건 영지다. 앞서 말했듯, 영지에게는 선한 아버지의 자리를 채울 또 다른 선한 아버지가 필요했고, 그가 유해국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유해국과 이영지는 서로 다른 이유와 경로로 결국 천용덕을 자살로 내몰았다. 이제 선택지는 두 가지다. 큰 타자의 자리에, 돌아온 선한 아버지가 앉거나 영지 스스로 그 자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끼>는 후자를 택한다. 강우석의 말대로라면, <이끼>는 그 결말에 힘을 쏟은 영화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 전체가 보이는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는 유해국이 아닌 이영지다. 마을을 방문한 유해국이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소스라치게 놀라는데, 영화를 보는 이들로서 더 놀라운 점은 그가 아무런 미련과 동요없이 이미 사회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그가 아버지의 자리를 반복하지 않고 어쨌든 사회로 복귀했다는 것은 죽은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끝내 이겼다는 것인가, 졌다는 것인가, 포기했다는 것인가. 그는 죽은 아버지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는가? 영화 안에서 그걸 추측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영지의 선택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이 있다. 지금 천용덕의 자리에는 이영지가 존재한다. 그녀는 자신이 끝까지 싸우며 버텼던 그 환상을 지켜냈다. 천용덕의 왕국과 단절한 새로운 공동체. 어쩌면 그녀는 새로운 공동체의 구원자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마지막 반전에 동의할 수가 없다. 여기, 다가올 미래를 낙관할 수도 없다. 단지 그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끝내 큰 타자라는 환상을 포기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선한 아버지의 자리’, 그 자리를 부수거나 그 허상을 대면하지 않고 그 안에서 또 다른 공동체를 꿈꾸는 그녀는, 그리고 이 공동체는 과연 얼마나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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