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더이상 다른 외국 문화가 일본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문화를 수출하는 걸 꺼림칙해한다. 또한 극소수의 일본 DVD들만이 영어자막이 입혀진 채 출시되고, 일본 영화사들은 여전히 프리뷰 테이프를 보내주길 싫어한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최근 “남한과 중국이 ‘쿨’ 문화 경쟁에서 일본을 앞지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는 지난 7월 초 파리에서 열린 재팬 엑스포에 한국 만화를 홍보하는 부스가 참여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본 통상부 공무원의 “이 행사를 한국 만화가 지배할 날이 올 것”이라는 비관적인 코멘트를 인용했다. 이 만화 부스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약 18억원의 비용을 들여 세운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일본영화산업이 쇠락하고 있다면 그건 정부의 지원 부족 탓이 아니라 일본 영화사들의 태도 때문이다. 국내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한국영화산업은 성장을 위해 해외시장을 개척해왔다. 1976년 탕산 지진을 다룬 중국 블록버스터영화 <여진>은 한국의 기술 스탭들이 참여해 장르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할리우드영화에 필적할 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영화는 국제영화제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된 건 한국영화가 국제영화제에 모습을 드러내기 수십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더이상 다른 외국 문화가 일본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문화를 수출하는 걸 꺼림칙해한다. 한류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음악, 영화, TV 등의 일본 제작자들이 국제시장 가격에 맞춰 자신들의 상품을 외국에 팔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좀더 실질적인 가격을 내세운 한국 경쟁자들에게 시장을 내준 덕분이었다.
일본의 영화시장은 현재 극단적인 포화상태에 놓여 있다. 지난해만 해도 극장에서 상영된 자국영화가 400여편이 넘는다. 일주일에 평균 8편이 개봉하는 셈이다. 100여개가 넘는 영화들은 아예 극장 상영도 되지 않는다. 일본영화산업이 이런 포화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은 영화감독과 스타들에게 충격적일 만큼 적은 돈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감독들은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찍어 수입을 충당하고 배우들은 명성과 수입을 얻기 위해 TV드라마와 광고에 출연해야 한다.
일본영화산업이 마주한 가장 큰 문제는 영화 티켓값이 한국 가격의 세배에 이르는 약 2만4천원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관객은 ‘아주 확실한’ 영화만 보러 가게 된다. 예를 들어 유명 소설이나 TV 시리즈를 영화화한 것, 또는 TV 회사들이 제작 파트너로 나서서 관객이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광고를 해대는 영화들 말이다.
한국영화가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이유 중 하나는 영어자막이 들어간 DVD들이 출시, 유통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명 국제영화제들이 최고의 한국영화들을 무시하더라도 해외 관객은 더 작은 규모의 행사들에서 그것들을 볼 수 있다. 반면 극소수의 일본 DVD들만이 영어자막이 입혀진 채 출시되고, 일본 영화사들은 여전히 프리뷰 테이프를 보내주길 싫어한다. 따라서 최고의 일본영화를 보여주는 영화제들은 일본말을 하는 프로그래머가 있는 영화제들로 국한된다.
그 결과 좋은 일본영화들을 고루 볼 수 있는 국제영화제는 특수한 작은 시장을 노린 영화제들인 부천영화제, 독일의 니폰 커넥션, 뉴욕의 재팬 컷 등에 국한된다. 이들의 일본영화 프로그래밍 수준은 로카르노나 산세바스티안 같은 영화제의 수준을 훨씬 능가한다. 베를린, 칸, 베니스도 이들보다 더 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제 (3대 영화제를 포함한) 유명 영화제들은 ‘쿨’한 것을 규정하기는커녕 더이상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도 결정하지 못하는 신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