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를 굉장히 좋아한다. 남녀 두 보컬의 음색도 사랑스럽고 (불행히도 여성 보컬 계피가 탈퇴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만) 나긋나긋한 멜로디도 정겹지만 무엇보다 덤덤하고 솔직하면서 쿨한 느낌의 가사가 마음에 든다. 이들의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인디음악을 오래 응원해온 사람으로서 뭔가를 ‘발견’했다는 나름의 성취감도 있었다. 그러나 놀란 건 이들이 이미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의 주된 팬은 (내가 보기엔) 대체로 7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난 이들로 감수성이 나름 예민하고 문화적 수용의 폭이 큰 부류들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브로콜리 너마저는 이들 세대의 밴드다. 비슷한 사회적 경험을 겪었고 그 속에서 비슷한 정서를 쌓아온 그들은 그러니까 세대적 동지인 셈이다. 결국 내가 브로콜리 너마저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그들 세대의 감수성을 갖고 싶다는 희망사항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도 이것과 비슷하다. ‘87 체제’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나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작들은 너무 가볍고 몰역사적이며 청산주의적으로 보였다. 후우, 불면 멀리 날아가버릴 것 같은 하루키의 정서적 무게는 리얼리즘이 문학과 예술의 본령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봤을 때의 정서적 혼란은 참 내, 아직도, 말로는, 잘 모르겠다, 는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초·중반에 20대를 맞이한 세대들은 하루키를 뜨겁게 맞이했다.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자신보다 20살 이상 많은 하루키를 세대적 동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도 바뀌었고 하루키도 바뀌었다. 그동안 하루키의 단편집을 읽었고 즐겼고 사랑했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었고 놀랐고 공감했다. <어둠의 저편> <해변의 카프카> 같은 장편도 읽었고 빠져들었고 감동했다. 그렇다고 하루키에게 세대적 동질감까지 갖게 되진 못할 게 확실하다. 몸이 불어나고 생각이 유연해지고 머릿속이 비워지면서 하루키에게 다가갔지만 하루키는 한층 무거워지고 어두워지고 환상 속으로 한발 더 들어갔다. 여전히 닿지 않는 정서의 잉여 같은 게 존재한다는 말이다. 어쩌면 하루키를 세대적 동지로 여기는 이들이라면 비슷한 궤적을 그려오면서 그와의 공감대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논하는 이번 특집기사에서 이해영 감독이나 정혜윤 프로듀서, 이이언씨의 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대적 동질감이 주는 건 결국 위안이라고.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내온 친구나 애인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안온함을 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술가와 팬 사이에 생기는 세대적 동지의식의 핵심이 아닐까 하고. 브로콜리 너마저나 장기하, 윤성호나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마음으로 늙어갈 수 있는 당신들이 솔직히 부럽다. 이번 주말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을 틀어놓고 <1Q84>를 읽으려는 것도 결국 질투심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