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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질주, 그 남자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악마를 보았다>의 배우 이병헌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을 두고 김지운 감독은 알랭 드롱을 닮았다고 했다. 장르영화 속, 이병헌의 마스크는 그만큼 강렬하고 또렷하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에서 배우 이병헌은 악에 몰려, 결국 스스로 악인이기를 택한 남자의 고통에 찬 얼굴을 보여준다. 얼음같이 차가운 냉랭함과 불같이 끓어오르는 뜨거운 분노의 크로스오버. 극한의 두 얼굴을 번갈아 쓰면서 배우 이병헌의 세포 마디마디 또한 쉬지않고 꿈틀거렸을 것이다. 오랜만에 충무로에 귀환한 배우 이병헌의 심경을 들어보았다.

이병헌을 만나기 전 미션이 주어진다면, 아마 그건 ‘그의 치밀한 머릿속을 헤집어보라!’일 것이다. 한류와 할리우드 진출, 대중영화와 작가주의영화를 손오공 구름 타듯 넘나들고 있는 그의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데뷔한 지 20년 된 이 배우를 더이상 수식할 말이 없어진다. 누구나 그가 정점의 순간에 섰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만의 이상을 향해 사뿐히 한발을 더 올려놓을 줄 아는 명석한 야심가였다. 많은 후배들이 이병헌을 롤 모델로 삼은 것도 쉽게 만족하지 않는 그의 기질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이병헌의 머릿 속 ‘배우’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달릴 심산인가. 이는 배우 이병헌만이 공개하고 해설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었다. 그가 순순히 답해준다면, 이번 만남은 그가 최근 보여준 일련의 대내외적 업적을 치하함과 동시에 배우 이병헌에 대한 일정한 주석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고 아주 잠시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스튜디오로 그가 들어서는 순간, 이 배우에 대한 해석이 가망없음을 알았다. 일단 자기관리에 능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태도의 냉랭함 따위는 그에게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 역시 고도의 기술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겠지만. 지난해 부산영화제를 찾은 기무라 다쿠야가, ‘친구’ 이병헌이 얼마나 우호적이며, 따뜻하고, 자유로운 사람인지 짧은 인터뷰 시간에 거듭 칭찬했던 것의 생생한 일례를 내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표현이 딱 맞겠다. 관리에 능한 사람으로 그를 규정짓지 말아야 할 두 번째 근거는 또 있다. 알다시피 그는 지금 일련의 개인송사로 연기를 하는 배우로서가 아닌, 대중 앞에 선 연예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좀 놀랍게도 나는 그의 매니저로부터 인터뷰 시작 전, ‘이런 질문은 삼가주십시오’라는, 이 업계에선 꽤 흔히 오가는 당부를 받지도 않았다. 대신 촬영을 끝낸 소회를 묻는 기자에게 이병헌이 대뜸 “편하긴요. 큰일 치렀잖아요. 그러니 일과 별개로 오히려 맘이 불편하죠”라면서 스스로 그간의 심경을 토로했다. 어떻게 손쓸 수 없는 거대한 오해 앞에서, 감수성의 촉수 하나하나를 보호받아야 할 배우 이병헌은 안쓰러워 보였다. 오해와 이해 사이, 그를 향한 대중의 비난과 언론의 판단 앞에서, 배우 이병헌의 내면은 다치고, 생채기가 나고, 굳은살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밀어붙여야 했다

“그럴 땐 잊자 해요. 내가 마음을 다스려야지 싶으니까요. 작품 들어가면, 더더군다나 어떤 일이 있어도 일부러 매니저에게 전하지 말라고 해요. 그래봤자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촬영에 지장을 주면 안되니까요.” <악마를 보았다>는 그러니까 이리도 배우의 심경이 복잡할 때 찾아온 꽤 강도 높은 작품이었다. 연쇄살인범 경철(최민식)에게 약혼자를 잃은 수현(이병헌)이 똑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복수를 가한다는 내용. 단 한줄로 요약되는 시놉시스만큼 배우에게 많은 걸 요구하는 작품도 없다. 김지운 감독과는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을 거쳐 벌써 세 번째 작업이지만, 이번만은 작업 자체가 굉장히 달랐다는 것이 이병헌 자신의 평가다. “밑도 끝도 없이 밀어붙여야 하는 캐릭터였어요. <놈놈놈>을 하면서는 몸이 힘들었다면, 이번엔 그렇게 딱 잡아서 힘들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그보다는 촬영하는 내내 어떤 기운이 감돌고 있고, 그 기운에 억눌려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달콤한 인생>의 ‘선우’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파국을 저지르고, ‘우리가 왜 이렇게 된 거지?’라고 되뇌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종류의 가해다. 수현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잘 알고 있으며, 그 복수의 정도가 어느 정도 끔찍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아는 남자다. 법에 앞선 개인의 복수를 다짐한 수혁은, 그 당위성을 배제한 채 방법 면에서만 본다면 끔찍하게 여성들을 살해하는 경철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연기를 하는 지난 4개월, 이병헌뿐만 아니라 최민식, 김지운 감독까지 이 처절한 복수극의 기운은 커다란 돌덩이처럼 촬영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럴 땐 배우에게도 똑같은 충격이 가해진다. 한국의 촬영현장이 전해주는 즐거움이 아니었다면 심적 고통을 쉽사리 해소하진 못했을 것이다. “<놈놈놈> 이후에 연달아서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 찍고 또 <나는 비와 함께 간다> 하고, 드라마 <아이리스>까지,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 했으니까요. 그 동안 쉬지 않고 달렸죠. 그럴 땐 작업에 빠지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어요. <악마를 보았다> 할 때도 매일 감독님하고 대화하고 영화에 대한 생각을 거듭하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잊는 거죠.” 이젠 오랜 지기가 된 김지운 감독과의 작업은 이럴 때 다른 작업보다도 다정하고 친밀하고 마음 편한 현장인 것만은, 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모르겠어요. <지.아이.조>가 워낙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 더 인간적인 면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제작사의 원칙이나 철저한 시간 관념에 모두 잘 적응하는데, 전 한국 작업 방식에 익숙해서 더 그 냉정함을 크게 느꼈는지도 몰라요” 감독과 함께 대화하고 영화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한국의 현장에서 작업해온 이병헌에게 최근에 참여한 글로벌 프로젝트들은 이물감도 안겨줬다. “홍콩에서 트란 안 훙 감독과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찍을 때 그 외로움 역시 말로 다 못해요. 망망대해에서 출발은 했는데, 기운은 이미 바닥이 났는데 어디가 남쪽인지 북쪽인지도 모르고 둘러보다가 그냥 앞으로 나가는 상황. 절대적인 외로움의 상황이었어요”

여유와 두려움 사이에서

<악마를 보았다>까지 내리 4년여를 한달음에 끝내고 보니 비로소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는지 모른다. 때로 막막했던, 또 때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지나온 자신을 보면서 그는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간의 자기 번뇌와 달리, 결과물에 대해서 팬들이 건네는 ‘잘한 선택이었다’ 혹은 ‘작품 속에서의 존재감이 빛났다’라는 어쩌면 입에 바른 칭찬이 그에겐 커다란 안도가 되었다. 그 순간은 정말 힘들었지만, ‘내가 판단을 잘했구나’라며 이젠 스스로를 다독일 줄도 안다. 물론 내년에 있을 <지.아이.조2> 촬영 전까지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휴식이라는 걸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한때 <내일은 사랑>으로 대변되던 경쾌하고 로맨틱한 모습 대신, <달콤한 인생> 이후 스스로 줄곧 냉정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각인되어왔다는 점을 실감한다. 때로 급하고 엉뚱하기도 한 본래 자신의 캐릭터를 어느 순간 자신도 잊고 있었지만, 이 짧은 휴식이 본래의 그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을 확신한다. 그러니 치밀한 계획을 가진 배우라는 수식과 평가 앞에서 한동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안심한다.

“배우로서 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없진 않죠. 태권도나 쿵후 같은 특기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온전히 배우 캐릭터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겠다는 배우로서의 꿈은 꿔볼 만한 거 같아요.” 그럼에도 제발 계획만은 묻지 말란다. 물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간 할리우드에서의 제안도 여럿 있었지만, 아직은 뭘 할지 정하지 못했어요. 모르죠. 매니저가 또, 한달이면 끝나는데, 라고 작품 들고 오면 하게 될는지….” 한달 아니라, 열흘 안에도 깔끔히 끝나는 작품이라면, 그래서 <지.아이.조2> 촬영 전에도 거뜬히 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 번뜩 스친다. “안 그래도 저 홍 감독님 영화에도 관심 많아요. 스케줄 때문에 기회가 닿지 않았던 적도 있고요. 그런데, 홍상수 감독님 영화는 제 자신이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건 좀 두렵긴 하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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