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남편이 죽으면 20년 동안 자유롭고 멋있게 살지만, 남자들은 마누라가 죽으면 2년 이상 못 산다. 살아봐야 (남자들은) 큰소리 꽝 치지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김기영 감독의 생전의 말은 괜한 농담이 아니다. 그의 영화 속 여자들은 독을 품고 살고, 남자들은 겁을 먹고 산다. “식물들은 눈도 없고 귀도 없고 감각도 사고도 없다. 그러나 벌과 나비의 취향에 맞춰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 향기를 만들어낸다. 이 꽃이 추구하는 것은 강한 삶의 의지뿐이다. 그러니 돈과 지위와 명성보다 좋은 아내를 얻어라.” <느미>(1979)의 준태(하명중)에게 대학교수가 전하는 말은 흔한 덕담이기보다 진중한 경고다. 여자들의 ‘강한 삶의 의지’ 앞에서 허튼 수작을 벌인 남자는 뼈도 못 추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난 여성들이 다 좋고 착하다고 생각한다. 처녀 시절엔 다 그렇다. 하지만 남자들이 여자의 가슴에 칼을 몇번 꽂으면 모두 악마가 되어가지고 복수를 하게 된다.”(김기영)
한국영상자료원이 7월27일부터 8월1일까지 마련한 특별전 ‘김기영의 女, 女, 女’는 마성을 뿜는 괴물 같은 여자들의 무시무시한 향연이다. 평소엔 현모양처처럼 보이지만 심한 의부증을 지닌 <화녀>(1971)의 정숙은 “수가 틀리면 두 년 놈들을 다 죽여도 좋아”라고 식모에게 말하고, 주인집 남편과 관계를 맺은 식모 명자는 정숙에게 “내가 (남편을) 뺏은 게 아니라 당신이 내게 바친 것”이라고 응수한다. 남자들은 존재로 서지 못한 채 여자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한다. 어수룩하고 무기력한 남자들이 여자들의 날카로운 고성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음의 강요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거나(<하녀> <화녀> <화녀82>), 간신히 연명한다 하더라도 정신분열증을 앓거나(<충녀>) 어린아이처럼 굴어야 한다(<육식동물>). <육식동물>(1984)의 전언처럼, “20대엔 천사고, 30대엔 고양이고, 40대엔 늑대고, 50대엔 마귀할멈”으로 여자들이 변신을 거듭하는 동안 남자들은 ‘살아 있는 송장’일 따름이다.
잘 알려졌듯이, <화녀> <화녀82>는 <하녀>(1960)의 시대적 변주다. 1990년대 후반 잊혀졌던 거장 김기영에게 ‘컬트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한 <육식동물> 또한 <충녀>(1972)를 바탕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지방업자들의 요구로 만들기도 했지만 난 이 세편(<하녀> 시리즈)의 영화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영화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인물의 캐릭터이고 시대상황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스토리의 반복이라고 리메이크 작품들을 제쳐둬선 곤란하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김기영의 여자들이 점점 더 ‘위험한’ 존재들이 된다. 또한 그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안온한 중산층 가정이 복원 불가능한 몰락과 붕괴의 지점에 봉착했음을 더 뚜렷하게 일별할 수도 있다.
사실 김기영 감독에게 리메이크란 큰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녀>(1979), <육식동물> <느미> 등에서도 현실에서 길어올린 악몽은 끊임없이 펼쳐지니까 말이다. 상영작들을 촘촘히 챙겨보면서 그가 생전에 미처 만들지 못했던 <악녀>를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이번 특별전에서 함께 상영되는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처럼, 고인이 된 김기영 감독의 충격적인 악몽의 세계가 어떤 영감을 전해줄지도 모른다. 이은심, 이화시, 윤여정, 전계현, 장미희 등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서 괴물의 얼굴을 보여줬던 ‘전설의 女배우’들과의 조우도 즐거운 일이다. 참고로 전 작품 모두 무료 상영한다(문의: 02-3153-2076~77, www.koreafil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