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바로 거기서 선언의 중요성이 비롯된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그의 감정의 공식적인 표현을 끝없이 빼앗으려 하며, 또 내 편에서도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지껄인다. (중략) 무언가가 알려지려면 말해져야 하고, 그리고 그것은 일단 말해진 이상 일시적이나마 진실이 되는 것이다.-롤랑 바르트
할걸~ 말할걸~.-밴드 백두산의 <말할걸>
지지난번 칼럼에서 ‘경제적, 물리적으로 솔직한 연출의도’를 얘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형이하학적인 제안을 한 뒤,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을 보았다. 내가 이리저리 우회하며 디민 이야기를 변학도 캐릭터는 더 압축담백하게 전하고 있었다. “저는 인생의 목표가 뚜렷해요, 아무래도 현감이면 그 고을 웬만한 여자들이랑은 다 잘 텐데….” 비슷한 소회를 나 역시 온라인에서 감상 가능한 콩트로 만들어 뿌린 적은 있지만 어쨌든 공무원 신분의 조상님이 더 솔직하셨다. 유 윈.
지난 칼럼에서는 이 원고의 유물론적인 용도에 관해서 재잘거렸었다. 이런저런 공과금을 낸 뒤 주말의 데이트를 위한 여벌의 재원이라는 이야기. 그래서 지금의 내 형편이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는 글을 보낸 뒤 영상자료원에서 하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회고전에서 1947년산 청춘영화 <멋진 일요일>을 관람했다. 2차대전 직후의 도쿄에서 긴축재정 데이트를 하는 한 서민 커플의 귀여운 역정- 한푼이라도 싼 공연장이나 커피숍을 찾아 뛰어다니는- 을 다룬 작품. 마침 회고전 입장은 무료, 직전에 내가 쓴 원고는 용돈과 데이트와 자존감의 어렴풋한 듯 절실한 상관관계.
삶이 원고를 흉내내고 있었네
갑자기 웬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중간정리인고 하니, 보통 매체에 기고할 경우, 마침 감상한 영화 또는 그즈음에 겪은 현실의 에피소드를 반영한 뭔가를 쓰게 마련인데, 요 몇달 동안은 그 순서가 오히려 바뀌어 있던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 우디 앨런 감독님이 말씀하셨던가.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살짝 바꿔서 인용하자면 “원고가 삶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삶이 원고를 흉내낸다”. 즉, 칼럼에 풀어낸 정서가 그 다음 겪는 실제의 에피소드 또는 주중의 영화 선택에 의식/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 그러고보니 이 칼럼 연재를 한 뒤, 같은 타이틀의 콩트 연작도 만들어 소개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오, 이거 좀 신기하다. 잘만 이용하면 많은 애로사항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함수상자’ 같은 게 하나 생긴 것일 수도. 예전에 존 캔디 아저씨가 나와서 먹끈도 없는 타자기로 타빨을 올리면 그 문장들에 맞춰 소원이 하나하나 성취되던 영화 <마법의 타자기>에서처럼 ‘내 맘대로 내 뜻대로 기본기본 원고공식 잉여들의 희망공식’. 단, 너무 큰 소원 말고 작고 무해한 그런 사항들. 가령, 평양냉면 한 그릇이 고프면 그 밍밍하나 거부할 수 없는 맛에 관련된 칼럼을 쓴다든지(그걸로 아쉬울 것 같으면 수육 얘기도 곁들여서), 신작 영화를 공짜로 보고 싶다면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는 재미에 관해 쓴다든지(혼자 보기 아까우니까 시사회에 이성과 동행했던 추억을 곁들여서). 다만 몰락이나 죽음에 관한 키워드들은 조심해야겠다. 그러니까 ‘이러다 나도 꼰대가 되어가겠지’라는 염려는 속으론 읊되 굳이 문장을 만들어 인쇄하진 말아야겠다. 말하여지는 순간 어느 정도 사실이 되니까! 실은 말할까 말까 하는 순간 이미 상당한 진실. 다만 굳히기에 들어가는 걸 주의하자는 얘기.
진중권을 문화부 장관으로 지명해볼까
이왕 쓴 김에 차라리 다른 욕심이나 밝혀보자. 초저예산의 독립영화를 우여곡절 끝에 완성할 순 있으나 그 홍보·배급의 과정이 여의치 않으니, 지상파를 통해 소개된 엔터테이너 중 문무를 겸비한 아이돌 또는 뮤지션(ex. 카라의 구하라, f(x)의 빅토리아, 검정치마의 조휴일)들과 서로의 윈-윈을 노리며- 이쪽은 스타 이슈가 없고, 그쪽은 영화 연기경력이 없으니- 날씬한 제휴를 하면 어떠한가 하는 잡상을 글로 써볼 수도 있겠다(요새 준비하는 초초저예산 영화에 건강하고 발랄한 10대 육상선수 캐릭터와 난처하고 귀여운 20대 장판 시공사 캐릭터가 있어서 하는 이야기… 가 맞다). 또는 레임덕 징후가 보이는 이 정부가 정말 회심의, 아니 회심 정도가 아니라 거의 패러다임 전환 정도의 각성이라도 한 양 일종의 제스처로서 진중권 선생 같은 분을 문화부 장관으로 지명해보면 어떨까. 물론 서로가 그런 제안도, 접수도 할 턱이 없겠지만,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 정권이야 다른 부처의 정책을 통해 딴 잇속은 챙기던 대로 챙기겠지만, 그런 묘한 생색이 해프닝으로나마 연출되면 그걸 관전하는 기분은 또 어떠할까 궁금하단 칼럼을 써보고 싶기도 하다. 그럴 경우 김규항 선생을 국가보훈처 처장으로(그런 거 잘하실 거 같다), 변영주 감독을 국방부 장관으로(얼마 전에 우연찮게 동석, 국가안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DJUNA 같은 분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령내면 어떨까(아, 정보통신부는 없어졌구나).
이런, 쓰다보니, 글로나마 다뤄봄직한 소소한 희망사항을 읊는 정도가 아니라 사안과 관련한 주무부처의 인사권과 예산집행권이라도 부여받은 것마냥 까불고 있다. 손에 쥔 것도 없는 채로, 타빨이 조금 먹힌다는 상상의 전제만으로도 내 작은 ‘의식’이 이런저런 ‘존재’들을 거명하며 이렇게 까부는데 ‘존재’, 그러니까 삶의 조건에서 어쩌다 2루, 3루를 할애받은 정권과 재계의 높은 이들이 자신과 남의 ‘의식’을 제 편의대로 규정하는 것은 얼마나 간단한 유혹일까. 에휴, 차라리 이번 칼럼의 문장을 통해 미리 진실이 됐으면 하는 최우선의 과제는 하나. 늦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유치하지도 않게 이 격주의 원고를 감당하는 것. 그 감당을 위해 지레 감당 못할 발설을 해둬야지, ‘글쓰는 게 제일 쉬웠어요’, ‘두근두근 원고 마감’, ‘원고에 대한 메타 원고는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