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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아이들에 대한 시각이 문제야

파시즘 비판이기엔 모자란 그 무엇 <하얀 리본>

무표정을 고집하면 역설적으로 주목되는 게 심리다. 감정이 배제된 듯한 메마른 표면은 오히려 불안한 내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리의 가면 때문이다. 문학이론가 피터 브룩스에 따르면 이런 표면과 내면의 역설적 관계가 멜로드라마의 기제다. 발자크의 소설에서처럼 작가는 사물의 표면 기술에 자신의 풍부한 어휘력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사실 발자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찬란한 언어로 장식된 표면 아래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숨어 있는 그 무엇을 브룩스는 ‘모럴 오컬트’(moral occult)라고 정의했다. 마치 밀교적인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윤리적 입장의 맹목적 지지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밖으로는 가치판단이 배제된 표피적인 사건을 풀어놓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윤리적 테마를 강조하는 게 발자크 소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모럴 오컬트’의 멜로드라마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은 모럴 오컬트의 멜로드라마다. 윤리적 테마를 숨기고, 그 테마를 내포하는 표면을 무심한 듯 그리고 있다. 마치 감독은 가치판단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과학자가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듯 세상의 표면을 냉정하게 관찰한다. 사람들이 대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잡혀 있으며, 특별히 내세울 만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온갖 장치들이 난무하는 대중영화와 달리 <하얀 리본>의 카메라는 대단히 중립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관객에 따라서는 영화에 쉽게 몰두가 안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네케의 이런 영화적 태도는 <히든>(2005)을 통해 이미 드러났는데, <하얀 리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래서 자주 비교되는 게 독일의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이다. <하얀 리본>은 아예 잔더의 사진작품을 보듯 스크린을 흑백의 건조한 이미지로 그려놓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평등한 조건에서 카메라의 대상이 되어, 무심한 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객관적 표현법으로 <하얀 리본>은 흔히 할리우드에서 컬러로 재현되는 역사극과 달리 거짓과 과장의 드라마가 아니라, 흑백으로 기록된 진정한 역사라고 말하는 듯하다. 허구의 재현이 아니라 사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진실만 냉정하게 기록한 듯한 수법도 아우구스트 잔더의 작업과 유사하다.

잔더는 인물사진을 말할 때면 어김없이 인용되는 독일 작가다. 1920년대 독일인의 ‘원형’을 기록하려는 포부를 품고 매우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찍었다. 그 결과의 일부는 <우리 시대의 얼굴>(1929)에 남아 있다. 마치 린네가 식물을 분류하듯 그는 과학자의 자세로 독일인들을 분류하려 했다. 잔더의 카메라에는 모든 독일인들이 평등하게 잡혀 있다. 굳이 차별이 있다면 상층계급은 실내에, 하층계급은 실외에서 주로 촬영됐다는 정도다. 실내의 문명과 실외의 자연으로 두 계급이 나눠져 있는데, 사실 그들의 존재 조건이 그렇게 구분돼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식물도감처럼 찍힌 그의 사진들에서도 ‘평등’이라는 진보적인 시각이 감지된다. 사실 사람을 평등하게 찍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겐 아무래도 애정이, 싫어하는 사람에겐 증오가 개입되게 마련이다. 영화에서 클로즈업과 롱숏이 있듯 말이다. 잔더는 자신의 사회주의 가치를 공공연히 드러내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 그의 활동을 방해한 데서 잔더의 정치적 태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잔더의 아들은 매우 적극적인 사회주의자였고, 결국 나치에 체포되고, 감옥에서 죽었는데, 아들의 운명이 아버지의 윤리적 태도와 상관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평등’한 인물사진

표면을 ‘중립적’으로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의 공포를 감수해야 하는 작업이고, 리얼리즘의 폭발성은 바로 이런 데서 나온다. 만약 나치의 리더들과 거리의 부랑아가 평등하게 찍힌다면 이런 게 바로 리얼리즘의 토대이자 제도에 대한 도전이다. 잔더는 나치가 지지하는 독일인의 모습만 기록한 게 아니라, 숨기고 싶은 사실도 어김없이 남겼다. 그의 작업도 브룩스가 본다면 ‘멜로드마라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드라마다. 무표정한, 혹은 무관심한 표면 아래에 강력한 윤리적 테마를 숨겨놓은 까닭이다.

<하얀 리본>의 이야기는 단순한 듯 복잡하다. 1913년,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독일의 어느 시골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가 연이어 일어난다. 의사가 낙마하고, 농부의 아내가 추락사하며, 곡물창고에 불이 나고, 남작의 아들이, 그리고 과부의 장애아가 린치를 당한다. 도대체 누가 이런 몹쓸 짓을 하는가? 영화는 범인을 찾아가는 긴장된 스릴러가 된다. 그런데 <히든>에서처럼 <하얀 리본>에서도 범인은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 이젠 하네케 드라마의 상투구가 된 열린 결말이 여기서도 이용됐고, 범인의 존재는 우리 각자의 상상 속에 남겨졌다. 영화가 복잡했다면 이런 모호한 종결과 뚜렷한 주인공이 없는 비관습적인 서사 형식이 가장 큰 이유일 터다.

자, 그러면 이제 영화의 윤리적 테마를 정리해보자. 영화가 공개된 뒤 나온 일반적인 평가대로 이 영화는 파시즘에 대한 강력한 은유다. 공동체의 성격이 특히 그렇다.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은 남작의 농장에서 소작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남작과 그의 권력에 윤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성직자, 이들은 부와 윤리를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종속된 대부분의 가난한 농부들이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남자들은 마치 잔더의 사진집 제목처럼,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별로 없고, 대개 ‘남작’ ‘목사’ ‘아버지’ 같은 사회적 역할로 호명된다. 여성들과 아이들처럼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개인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종종 이름으로 불린다. 부와 윤리가 독점되며, 개인이 지워지고, 공동체가 강조된 이곳은 누가 봐도 파시즘의 은유이며, 현 지구촌의 패러디다.

<하얀 리본>은 구시대적 권력층의 파시즘은 결국 저항을 불러올 것이며, 세상은 테러가 횡행하는 디스토피아로 변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하얀 리본>은 파시즘에 대한 준엄한 고발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파시즘을 닮아가는 현 지구촌의 운명에 대한 묵시록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죽은 주제 사라마구의 표현법을 빌리면 ‘눈먼 자들의 도시’에 대한 날카로운 경구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범인을 암시하는 태도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는 않지만 시종일관 의심받는 대상은 어린아이들이다. 범죄의 책임을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묻는 태도는 호러영화에서 자주 써먹는 장치로, 주로 보수 세력이 이용하는 낡은 수법이다. 제도권에 포섭되지 않는 대상은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이다. 아이들은 충분히 학습되지 않았고, 심지어 제도의 명령을 위반하는 타자들로 배제돼 있다. 하네케는 짐짓 파시즘의 폐해를 기록하며 현 지구촌의 모순을 염려하는 듯하지만, 그런 파시즘을 잉태한 공동체의 구조에 대한 자기반성을 보여주기보다는 그 공동체에 섞여들지 않는 사람들을 타자로 배제하는 데 더 역점을 두는 것 같다.

공동체의 타자로서의 아이들

영화의 후반부, 마치 피터 브뤼겔의 겨울 풍경화를 보듯 평화로운 마을의 표면이 스크린을 지극히 아름답게 장식한다. 아이들은 이런 아름다움과 평화를 깨는 악마의 무리처럼 떼지어 다닌다. 이 마을이 현 지구촌의 은유라고 할 때, 그러면 아이들의 은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영화의 염려대로 21세기도 파시즘이 잉태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면, 권력과 윤리를 독점한 파시즘에서 비켜나 있는 아이들은 누구일까? 단언컨대 서구의 제도권 내의 사람들은 결코 아닐 것이다. 파시즘의 잉태와 그 폐해에 대한 드라마였던 <하얀 리본>이 윤리적 테마에서 온전한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타자로서의 아이들에 대한 시각 때문이다. 파시즘과 테러리즘 가운데 영화는 뒤로 갈수록 테러리즘에 방점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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