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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수 있는 자가 구하라] 마감생태보고서
윤성호(영화감독) 2010-07-16

연재 소재의 의미와 재미를 찾아 근심하는 이의 즐거운 고백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 걸까? 혹은 어른이 될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쩌면 슬플 그날에 한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뿐일까?-최규석 <습지생태보고서> 중에서

보다시피 2주에 한번씩 <씨네21>에 200자 원고지 15페이지 안팎의 원고를 보내야 한다. 그래도 <씨네21>인데, 대학교 1학년부터 애독하던 관록의 영화저널인데, 학부 시절 몸담았던 영화동아리 선배들도 어디선가 펼쳐볼 텐데, 뭔가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글을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의미와 재미, 공격과 수비, 박지성과 이영표. 이 둘만 갖추면 무엇이 무서우랴. 그런데 의미가 있으려면 그 ‘뭔가’에 대한 근심이 우선해야 할 테고, 재미가 있으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트를 섞어 풀어내야 할 텐데… 쉽지 않다. 두어번 자족할 만한 글을 쓴 것도 같은데 전해 듣기로는 오히려 그 원고는 별로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작 글 바깥세상에 대한 근심보다 원고 마감에 대한 근심만 가득하다.

참, 여담인데, 어떤 사안을 신경쓰며 궁리하는 걸 그냥 ‘고민’이라고 하지 않고 ‘근심’이라 쓰면 좀 있어 보인다. ‘근심’은 뭔가 꾸준하고 간절하게 마음 쓰는 것 같고 ‘고민’은 어쩌다보니 연예인이 옷을 고르는 이미지가 연상된다(고! 유 고 걸!). 그래서, 오히려, 나는 ‘근심’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문필가 분들을 보면 조금 그 속이 보이고 귀엽다. 근심하는 이미지를 위해 근심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은데 그게 혼자 잘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같이 세상을 근심하자고 권유하는 것일 테니 나쁘지 않다. 근데 앞으로는 종종 그냥 ‘고민’이라는 말도 사용해서 ‘근심’ 2음절의 포스를 아껴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계속 마음이 쓰인다’라는 표현도 괜찮겠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맹자의 말씀

다시 본론(정녕 이 글의 본론은 무엇이 될까). 처음 연재를 승낙할 때, 마침 아무런 수입원이 없었다. 그간 영화 자체로는 별 소득이 없었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이런저런 부수입- 자잘한 영상, 원고, 강의에 대한 대가- 덕분에 은근히 출출하지 않게 살아왔으나 딱 지난해 겨울부터 일도 없고 님도 없고 뽕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그럼에도 큰 걱정을 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한 이후로 잔고가 간당간당할 때면 마치 그런 내 사정을 CCTV로 지켜보기라도 한 듯 긴요한 수입원이 생기곤 했으니까. “여기 월간 00인데요, 에세이 한편 청탁하고 싶습니다. 원고지 한장에 얼마얼마.” “저, 여기는 00학교인데요, 와서 특강 한번 하실래요. 한 시간에 얼마얼마.” 그 고마운 관성들이 소심한 개인을 살짝 대범하게 만들었다. 실은 두 번째 이유가 더 든든하다. 부모님이 이른바 부유층까지는 아니지만 퇴직 뒤에도 알아서 생활하고 계신다는 점(가령 임플란트를 하는 등 큰 견적의 일상도 그간 저축한 돈으로 알아서 해결을 하신다). 게다가 내 호주머니에 정말 한푼도 없을 때 전화를 하면 기십만원 정도는 급한 대로 융통을 해주신다. 지난해 사는 곳을 옮길 때는 전세 보증금도 내주셨다(이체 수수료 생기니까 국*은행 계좌를 하나 만들라고 매번 말씀을 하시는데 그러면 돈 꾸는 게 버릇이 될까봐 안 만들고 있다). 영화를 만들건 어떤 발언을 하건 간에 알고 보면 엄마, 아빠가 받쳐줄 최소한의 언덕을 믿고 까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무항산 무항심.

따라서 <씨네21>에서 격주 칼럼 연재를 부탁했을 때 목소리 관리는 하면서도 ‘이번엔 이게 징검다리구나, 사양하지 말아야지’ 하고 곧장 마음을 먹었었다. 한달에 두 번 입금되는 원고료는 조금 아쉬운 액수지만,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 같은 시를 생각하면 감지덕지다.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인만큼 청빈하진 않아서 쌀 두말로 만족은 못하겠고, 그래도 이런 졸고 하나로 전기료, 가스료, 수도료 등등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노골노골한 시리얼 정도는 된다(다만 지난겨울, 이사온 집의 난방 시스템을 잘못 이해한 덕에 가스료는 초과였다). 또 여담이지만, 가진 분들의 위원회에서 시간당 최저임금을 10원 인상해놓고 생색을 내고 있단다. 1주 5일, 하루 8시간 노동으로 치면, 가령 청소 용역 노동자에게 한달에 1600원 정도 더 받으라는 얘기. 마침 KBS 수신료 20% 인상에 대한 소식을 어떤 분이 비교 대상으로 인용해놓았다. 이렇듯 세상은 후안무치한 시트콤이 되어가는데 나는 그래도 초대손님 정도로 점잖게 대접받고 있는 셈.

영화를 얘기하는 공간 속에 있다는 즐거움

원고료+알파의 무언가를 기대한 듯도 하다. 당장 작품은 못 만들고 있지만 그래도 영화를 만들고 얘기하는 커뮤니티의 자장 속에 아직 나름의 거처가 있다는 걸 어떤 이름들에게 알리고 싶었나보다. 스스로 다루는 주제에 관심이 지대했다기보다는 어찌됐든 원고 청탁도 받고 영화 비슷한 것도 준비하고 작게나마 호감의 커뮤니티를 유지하는 정도의 존재는 된다는 사실을, 스쳐간 사람들에게, 그보다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데 열중했다. 딱 그 정도 마인드로 소재를 고르고 뭔가 미괄식의 문장을 겨우 생각해내 늦은 원고를 발송하면, 편집해주시는 분께서 나름의 줏대가 있는 글로 보이게 정성스레 포장을 해주셨다. 힘드셨을 거다.

각설하고, 실제의 나에겐 낯짝이 긴요치 않아도, 동족에게 뿌리는 말글엔 염치가 필요한지라 편집을 담당하는 분에게 이메일로, 그리고 한번은 전화를 통해 칼럼 연재를 그만하고 싶은 심정을 긁적긁적 알린 적이 있다. 하나 최소 몇달은 더 연재를 해야 한다는 정중한 답변. 하긴 오히려 그런 만류를 접수하고 싶었나보다. 의무적으로라도 좀더 연재를 해야 한다는 신임투표, 뭔가 아쉬운 글이 나오더라도 그 책임을 분담하자는 일종의 양해각서, ‘저는 약해요, 그러니 할인을 해서 읽어주세요’ 하는 응석.

그리하여, 종로에서 자취를 하는 성호는, 오늘도 이 원고를, 더불어 그외의 작디작은 프로젝트들을 포기하지 못한 채 (아니 오히려 절실히 부여잡은 채) 한달에 00만원 정도를 융통하는데, 휴대폰요금 십여만원, 교통카드 5만, 6만원, 보통 직접 만든 카레나 김치찌개를 먹지만 그래도 가끔은 평양냉면, 그리고 여건에 비해 잦은 술자리에서의 호기, 그 때문에 택시를 타고, 비누와 선크림, 휴지와 반찬거리, 그리고 어쩌다 누군가 추천한 소설(최근에는 임영태 작가의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이나 조금 버거운 단가의 공연, 또는 9와 숫자들이나 검정치마의 CD를 구매, 그러다보면 정작 말도 걸고 잠도 자고 싶은 사람과 만나서 쓸 돈으로는 얼마 남지 않으니까 그냥 집에서 자위를 하거나 (이제 그만) 돈 안 드는 거리를 걷거나 (그러나 관절) 그러다 가끔 자신이 자본주의를 크게 개의치 않는다 생각하는 상대를 만날 경우 아트시네마에서 1편에 6천원짜리 역사를 함께 겪고 (가령 미클로시 얀초) 늦은 옥상에서 새삼 마음을 고백하고 다시금 영화를 찍고… 그래요, 내게 ‘근심’이 있다면 오로지 당신. 의미가 있다면 ‘여기까지 가져온 노래뿐’.

*이 글은 2008년 서울아트시네마 후원을 독려하기 위해 쓴 단문이 다른 수요로 확장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