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DVD > DVD
[dvd] 노인을 위한 영화는 있다

<팔월의 오찬> Pranzo di ferragosto(Mid-August Lunch)

2008년 / 지안니 디 그레고리오 / 73분 1.85:1 아나모픽 / DD 5.1, 2.0 이탈리아어 영어 자막 / 아티피셜 아이(영국)

< 화질 ★★★ 음질 ★★★☆ 부록 ★★★ >

영국 억양이 아름답다고 아부하는 한 미국인에게 영국인 교수는 따지고 싶다. “당신은 런던 동부의 억양과 글래스고 남부 억양을 구분할 수 있나요?”라고. 평소 영국식 발음 운운하던 사람으로서 소설 <싱글맨>의 한 부분을 읽다 뜨끔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외국영화 몇편을 맛본 다음 그 나라의 영화와 문화를 아는 양 행세하는 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한국영화를 몇편밖에 보지 못했다던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얼마 전 한 리뷰에 ‘한국인은 스릴러를 잘 만든다’라고 썼다. 그가 만약 한국에서 만들어진 대다수의 스릴러를 본다면 글을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근래 부흥을 맞은 이탈리아영화에 대해서도 그런 선입견이 존재한다. 노장 마르코 벨로키오가 부활하고 파올로 소렌티노, 루카 구아다니노 등이 견인하는 가운데 다양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우리는 이탈리아영화의 컬러를 여전히 범죄 및 정치와 연결짓곤 한다. 그런 점에서 베니스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팔월의 오찬>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탈리아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고모라>의 감독 마테오 가로네가 제작을 맡고, <고모라>의 각본에 참여한 지안니 디 그레고리오가 연출과 주연배우로 나섰으며, 같은 해에 만들어진 <고모라>와 <팔월의 오찬>이 공교롭게도 이탈리아의 명암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고모라>의 해독제처럼 보이는 <팔월의 오찬>은 푸피 아바티 등에 의해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이탈리아 코미디의 유쾌함을 다시 떠올리도록 만드는 소품이다.

과부가 된 어머니를 10년간 보살핀 디 그레고리오는 어머니와 친구들의 힘과 열정에 매료됐고, 그들이 삶에서 느끼는 기쁨에 주목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기억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팔월의 오찬>은 그러니까 어느 정도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얼굴에 검버섯이 핀 중년 남자 지안니는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잠들 때까지 <삼총사>를 읽어준다. 그는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노모가 부르자 군말하지 않고 일어난다. 착한 아들의 감동 드라마를 미리 예상했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와 아들과 가족에 관한 이탈리아식 질문을 던지는 벨로키오의 <내 어머니의 미소> 같은 영화도 아니다. 위의 도입부에서 카메라는, 전경의 노모에 초점을 맞추고 뒤의 아들을 다소 흐릿하게 잡으면서 감독의 의도를 명확히 한다. <팔월의 오찬>은 노인들이 중심에 선 드문 영화다. 로마 시민 모두 휴가를 떠난 8월 중순, 어머니에 묶여 지내던 지안니는 관리인과 가정의의 부탁에 따라 세 할머니를 이틀 동안 떠맡는다. 잠자리, 음식, 놀이를 둘러싸고 네 노인은 천진난만함과 뻔뻔함과 고집으로 부산을 떨고, 그들 사이에서 지안니는 손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팔월의 오찬>을 통해 우리는 유효기간이 지난 폐물로 대하던 노인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잠든 노인의 머리맡에는 ‘여든의 나이에도 훌륭한 파스타를 만드는 걸 기념하는 상패’가 놓여 있다. 노상 카페로 도망간 다른 노인은 집으로 돌아가자는 지안니의 독촉에 “난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 하고 싶은 걸 즐길 거야”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부심과 희망과 사랑으로 넘치는 선배이며,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억지스러운 예의가 아니라 존재의 인정이다. 삶의 긴 여정을 소화한 자들은 모두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 그들에게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에게 손해이다. 이탈리아인 특유의 낙천성과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이 큰 기둥인 <팔월의 오찬>은 소박하고 진득한 설득력을 지녔다. DVD는 영화의 제작과정을 자상하게 풀어놓은 감독 인터뷰 두 가지(7분, 14분), 네 할머니를 연기한 배우(그들은 모두 비전문배우들이다)와 감독의 재회(20분), 예고편을 부록으로 제공한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