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스튜디오에서 생긴 일이다. 촬영을 하던 중 조명 하나가 무엇에 걸렸는지 쓰러지려고 하자 이를 목격한 스탭 한명이 얼른 달려가 그 조명을 가까스로 잡았다. 한국에서야 박수받을 일이지만 그 스탭은 해고되고 말았다.” 할리우드에서는 자기의 일 외에 그 어느 것도 함부로 손대서는 안되는 게 불문율이라며 이것이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던 그들만의 생존법칙’ 중 하나라고 한유정 미술감독은 그녀의 책에 썼다. 미국 유학 시절 우연히 한국영화 <러브>와 연을 맺은 뒤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영화에 뛰어들게 됐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헐리우드 미술총감독 자리에까지 오른 한유정 미술감독. 그녀가 대표작 <베터 럭 투모로우>, <풋 프린즈>, <댄싱 닌자>등 수십편의 할리우드영화를 만들면서 보낸 지난 13년간의 인생 경험담을 <꿈보다 먼저 뛰고 도전 앞에 당당하라>는 책으로 묶어냈다.
-한국과 할리우드의 프로덕션디자인 작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나. “한국에서는 내 일만 하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간주되지만 할리우드에서는 남의 일을 거들었다가는 아마추어로 간주된다”는 요지의 말이 책에 있다, 재미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체계성인 것 같다. 할리우드는 각자의 역할이 뚜렷하다. 미술부만 보아도 그렇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보다는 훨씬 더 수평적이다. 아무리 아랫사람이지만 그들은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더 탄탄해질 수 있는 것 같다. 한국영화 미술부를 곁에서 본 적이 있는데, 할리우드와 가장 큰 차이점라면 각자의 지위를 미술감독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서 본다는 것이었다. 미술감독이 되기 위해 소품 담당을 거친다는 식으로. 그렇게 되면 전문성이 떨어진다. 할리우드처럼 소품만 20∼30년 담당한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할리우드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다. 한국에서 건너가 할리우드에서 일하게 된 경우다. 어려웠겠다.
=가장 힘들었던 건 할리우드식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그 친구들이 페이스가 되게 빠르지 않나. 빨리 말하지 않으면 그냥 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아주 짧은 몇초 안에 내가 전달해야 할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는 건 모국어로도 힘든 일인데 그걸 해야 했다. 작은 커뮤니케이션의 실수로 편견이나 오해를 받을 수도 있어서 더 조심스러웠다. ‘그 아시아 여자가 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런 거다’라는 쪽으로 추측이나 사건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할 때는 모든 걸 데이터로 다 기록해 남겨두는 습관까지 생겼다. (웃음)
-<꿈보다 먼저 뛰고 도전 앞에 당당하라>는 책을 출간했다. 개인의 경험담이 연대기별로 주가 되고 있다. 어떤 내용을 전하고 싶었나.
=내 이야기가 몇년 전 방송에 나간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메일로 어떻게 하면 나처럼 할 수 있는지 물어온다. 꿈과 이상은 있는데 현실 앞에서의 두려움 때문에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이 친구들에게 나의 우여곡절 많은 경험담을 들려주고 그들이 읽고 공감하면서 희망과 도전을 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며 당신이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은 언제였나. 또 가장 싫은 순간은 언제였나.
=할리우드에는 ‘Love and Hate Relationship’이라는 말이 있다. 할리우드가 그런 양면성이 있다. 보람있었던 때는 내가 예산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고 사람들이 그걸 알아줬을 때다. 특히 감독보다 배우들이 내가 만든 공간에 들어가서는 정말 자기들의 현실처럼 느껴진다고 말할 때 가장 듣기 좋다. 그때는 정말 배우의 남은 2%를 내가 만든 세트가 채워준 것 같다. 싫었던 순간은 편견으로 인해 오해받을 때마다 내가 그걸 증명해야 하는 것이 가장 속상했다.
-기억에 남는 영화 작업은 어떤 것인가.
=<베터 럭 투모로우>. 고생을 많이 했다. 배워갈 때 했던 작품이다. 위에서 눌리고 아래서 치이는 악조건이었다. 아랫사람은 거의 자원봉사자 수준이었으니 내가 네다섯 사람 몫을 해야만 했다. 하고보니 나중에 보람이 컸다. 지금도 아시안 배우나 스탭이 작품의 중심에 있을 때 편견이 작동한다. 백인이 들어가줘야 한다는 등. 하지만 <베터 럭 투모로우>는 웃을 수 있는 결과를 냈다. 뚜렷한 인장을 찍었다고 할까. 좋은 성과였다.
-어떤 작품을 해보고 싶나. 또는 누구와 함께 일하고 싶나.
=프로덕션디자이너로는 마틴 스코시즈와 작업을 많이 한 단테 페레티를 존경한다. 세트가 배우를 앞서는 나쁜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의 세트는 그렇지 않다. 마틴 스코시즈의 <좋은 친구들>도 좋아한다. 작품의 종류로 치자면 상상력이 많은 영화를 좋아한다. 팀 버튼의 영화 같은. 다재다능한 J. J. 에이브럼스도 좋다. 신나는 갱스터, 전쟁영화도 해보고 싶다. 제작자로는 제리 브룩하이머, 방송인으로는 오프라 윈프리도 좋아한다. 그리고 배우 중에는 로버트 드 니로가 정말 예전부터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인데 요즘 보면, 이 사람이 많이 늙었다. 아, 그가 더 늙기 전에 같이 해야 하는데.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