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편을 만든 뒤 두근거리며 영화제 출품신청서를 쓰던 날, 가장 난감했던 과제는 이른바 ‘연출의도’라는 항목을 채우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객이나 프로그래머의 감상 포인트를 묻는 기능적이고 간단한 질문이건만 당시에는 ‘도대체 왜 이런 고만고만한 콩트를 만들어서 영화제 사무국의, 또는 안 그래도 점점 더워져가는 지구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가’ 준엄하게 묻는, 과장하자면 염라대왕이 디미는 ‘업경대’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내가 기입한 문장은 연출의 변이라기보다 제작 동기에 관한 쭈뼛쭈뼛 이실직고. ‘영상을 전공하지 않은 저희들이 이런저런 설을 어느 정도의 비주얼로 풀어갈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지레 겁먹은 티가 확 난다. 또는 미리미리 너그러운 감상을 청하는 은근한 잔머리.
연애 초보의 프러포즈랑 비슷한 행동 ‘ctrl+v’
그 뒤로도 한동안은, 단편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데 들이는 머리와 가슴의 기회비용만큼이나 그놈의 연출의도를 쓰는 데 기운을 뺀 것 같다. 너무 정직한 답은 좀 없어 보이는 듯하여 알 듯 모를 듯 선문답 같은 말을 끼적거리기도 했고, 반대로 영화의 개성에 별로 자신이 없을 경우에는 일부러 경쾌한 문장들을 동원하여 ‘아, 이거 재미로 촬영한 거, 그냥 유희로 편집한 거’라는 식으로, 가련한 내 진심을 호위하기도 했다(연애 초보의 프러포즈랑 비슷하다). 나중엔 아예 팝송 가사 중 그럴듯한 소절을 의역하여 갖다붙이기도 했고, 심지어 다른 이들의 연출의도를 ctrl+v한 뒤 몇 가지 보통명사만 바꿔본 적도 있다(야, 이거 진짜 연애 초보의 그것과 비슷하다). 사실 지나가는 관객 입장에서야 연출의 변 따위가 뭐 그리 눈에 들어오겠는가. 차라리 대략의 줄거리를 찰지게 소개하려 애쓰는 게 남는 장사. 다만 영화제에서 두어석삼네댓번 상영하고 나면 대략 그 수명이 정리되는 대개의 단편영화 입장에서는, 팸플릿에 들어갈 시놉시스나 연출의도가 그나마의 조그만 호객이요 청원이기에 수요가 빤한 줄 알면서도 깨알 같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연출의도의 ‘오지선다’ 옵션
세상 많은 일들이 그렇듯 이런 난감함은 결국은 주변 무리들과 비슷한 모양새로 착지하며 해소되게 마련. 그렇게 옆사람들의 출품신청서를 참조하며 알게 된 재밌는 패턴. 가령, 뭔가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영역을 시청각적 실험으로 대치하려는 이들일수록 오히려 연출의 변이 주야장천 긴 편이다. ‘자, 지금의 말글로는 뭔가를 할 수 없다’는 선언을 다시 기존의 말글에 기대어 풀어내는 속절없는 아이러니. 단, 이력이 쌓이고 쌓여 연출자의 이름 자체가 어느 정도 전위적인 브랜드가 된 뒤부터는 또 지나치게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기본수요를 확보한 록스피릿이라고나 할까. 한편 다큐멘터리 연출자들도 의도를 길게 쓴다. 자신의 형식이나 포부에 대한 ‘변’이 길다기보다는 직접 관찰한 현실의 모순이나 대안에 관해 소상히 설명하며 관심을 청하는, 운동가 또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의무감을 동반한 때문. 그렇다면 가장 간명한 연출의도를 쓰는 종목은? 아무래도 애니메이션 연출자들… 이라는 선입견에 근거해 철지난 영화제 책자들을 뒤적여봤더니, 오옷, 아니다, 이 양반들도 말이 많다! 매체와 작업의 특성상 독립영화제에 초청되는 애니메이션들의 경우 5분 안팎의 초단편들이 대부분인데, 러닝타임 대비로 치면 이 계통 분들이 오히려 가장 할 말이 많은 듯도 하다. 프리에서 현장에서 꾸준히 사람을 대하며 말로 무언가를 성사시켜야 하는 실사 연출자들과 달리 모니터와 태블릿 앞에서 입 다물고 있는 시간들이 가장 긴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현실에서 가장 발화가 많은 극영화 연출자들일수록 연출의도를 짧게 쓴다. 어떤 영화학교들의 팸플릿을 볼 때면 각자의 연출의도끼리 서로 하이쿠 대결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문득 알아차린 마음’, ‘집에 갈 수 있을까?’, ‘3월의 하늘’, 뭐 이런 식으로 여운을 남기(려)는 어절들이 그 옆의 말간 프로필 사진들- 역시 다큐쪽 증명사진들과는 다르다- 과 엮이면 어느새 영화제 소책자는 소장파 예술가들의 미니홈피(조만간 저 트렌드들이 f(x) 노래가사처럼 ‘그냥 음절’로 진화하지 않을까 점쳐본다).
개봉하는 장편영화들의 감독은 그런 연출의도를 굳이 기입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의 카피는 홍보팀이 중지를 모아 작성해주고 그 영화의 인문적인 가치는 (그런 게 있다면) 전문적인 필자들이 서술해준다. 그래도 기자나 관객이 다시금 연출자의 발화를 청할 때가 있다. “그럼 감독님께 묻겠는데요, 이 영화를 연출하신 의도는 무엇인가요?” 이 경우, 대개의 연출자들은 ‘언어를 대신하는 표현을 다시 언어로 풀이해야 하는 역설 앞에서’ 짐짓 난감한 표정들을 짓지만 사실 이미 오지선다 정도의 옵션이 있다. 1)“욕망의 문제를 다뤄보고 싶었다” 2)“이 시대에 과연 이런 가치는 존재할 수 있을까 묻고 싶었다” 3)“소통이다, 소통을 얘기한 거다” 4)“그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려 했다” 5)“(종합판) 이 욕망의 시대에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가치로 여러분과 소통하고 싶었다”. 그리고 기타 등등. 모두 일리와 진심이 담긴 진술일 터.
‘연출의 의도’가 아닌 ‘연출한 의도’를 발설해봐
하나 문득 드는 짓궂은 마음. 한번쯤 아니 두번쯤 그 서사가 언덕으로 삼은 관념이 아닌, 그러니까 ‘연출의 의도’가 아닌, 말 그대로 굳이 그 영화를 ‘연출한 의도’를 발설해보면 어떨까(지금의 산업은 기획자들의 마인드가 더 큰 몫을 하니까 ‘기획의도’로 바꿔 읽어도 되겠다). “예, 실은 개런티로 한남동에 전세방을 하나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음, 이 저예산 프로젝트 덕분에 일단 사무실의 경상비를 구할 수 있었지요”, “뭔가 동양적인 영화를 만들어서 베니스나 베를린 같은 데 가면 간지나잖아요”, “흥행하는 영화를 하면 아무래도 이성과 관계를 맺을 기회가 많아지지 않을까요”, “그냥 입봉시켜준다고 해서요” 기타등등. 영화를 만든다는 숭고한 쇠똥구리짓의 진짜 정체는 아니더라도 분명 그 행군을 지속하게 하는 물리적, 경제적 필요들. ‘그럼 너는? 너는 뭘 그렇게 궁여지책의 자투리 서사들을 만들어내는데?’라고 묻는다면 여전히 내가 준비한 것만큼 가련한 대답이 있을까. ‘아아, 저는 다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지금 영화를 만듭니다. 저의 쳇바퀴를 응원해주세요, 그럼 저도 당신의 쳇바퀴를 응원해드리겠습니다.’
ps. 요새는 어디 연출의도를 써낼 일이 있으면 전작에 관한 리뷰들을 뒤적여서 그중 마음에 드는 문장을 ctrl+v한다. 과연 연애와 비슷하다.
pps. 마침 정권 및 특정 언론들이 더 시나리오를 많이 써내는 시절이다. 곧이곧대로 듣지 말고 연출의도, 기획의도를 캐물어보는 센스를 권장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