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6일, 일산에 영화인들이 몰려들었다. CG스튜디오인 디지털 아이디어의 개소식 때문이었다. 디지털 아이디어는 DTI픽처스, EON디지탈필름스, 인사이트비주얼 등 3곳의 CG전문업체가 합병한 회사다. 이름도 인사이트비주얼의 I, DTI의 D, EON의 E와 합쳤다는 의미에서 Association의 A를 따서 지었다. DTI는 <중천>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EON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괴물>을, 인사이트비주얼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태풍> 등의 CG를 맡았던 회사다. 3곳 모두 그동안 한국영화의 상상력을 넓고 깊게 넖혀왔다는 점에서 이들이 손을 모은 디지털 아이디어의 출범은 한국영화계의 올해의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는 디지털 아이디어를 이끄는 세명의 본부장이 된 강종익(전 인사이트비주얼 대표), 이윤석(전 DTI 대표), 정성진(전 EON 대표) 등은 합병 이후 영화계 내에서 삼형제로 불린다고 한다.
-지난주에 개소식을 열었다. 일산에 자리를 마련한 건 언제였나. (강종익) 한달 전이었다. 법적인 합병은 4월1일부터다. 올해 2월부터 실사 등 합병에 관한 실무 작업을 진행했다.
-세 회사가 합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이윤석) 사소한 자리에서 시작됐다. 말하자면 술자리다. (웃음) 2008년 9월 즈음에 CG업체 대표들이 처음으로 사적인 술자리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는 우리 셋 말고도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여러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해보자는 쪽으로 대화가 오갔다. 이를테면 정부의 CG 관련 연구개발 정책 같은 거 말이다. 그때는 여러 면에서 CG업체가 편수든 매출이든 1위를 해봤자 골병만 드는 상황이었다. (정성진) 컨소시엄 형태를 구축해보자는 이야기나 홀딩스를 만들어서 한지붕 아래 있는 건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규모의 스튜디오를 만들어야 외국에 나가서도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 같더라.
- 평소 세 회사의 대표들간에 친분이 있었던 건가. 다른 CG업체도 있는데, 어쩌다 지금의 구성이 된 건가. (이윤석) 일부러 배제한 게 아니라 그런 술자리에 나오는 사람이 셋밖에 없었다. (웃음) (강종익) 다들 그때 9월에 처음 만났다. 다행히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 이후 영화제나 세미나 같은데 참여할 때 공동으로 데모영상을 만들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내놓을 만한 기술은 갖고 있으니, 따로 하기보다는 같이 해보자고 한 거였다.
- 컨소시엄과 홀딩스 형태를 논의하다 합병을 결정하게 된 건 어떤 계기였나. (강종익) 우리가 재무나 회계에 전문가는 아니다 보니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SK텔레콤이 인수를 하겠다고 나서면서 구체적으로 합병이 논의됐다. (이윤석) 그렇게 10개월이 흘렀는데, 결국 SK텔레콤과는 결렬됐고 그 뒤에 인터파크를 만났다. 두달 만에 딱 정리가 되더라. 지금 인터파크 대표이사인 이승훈 사장이 원래 SK텔레콤 본부장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그분을 보고 협상을 결정했던 거라 찾아가서 책임지라고 드러눕다시피 했다. (웃음)
-SK텔레콤이나 인터파크나 CG사업과의 관계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가능성을 본 건가. (이윤석) SK텔레콤이나 인터파크나 항상 신규 사업에 대한 리서치를 하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 SK텔레콤과 대면할 때 그랬다. 이거 왜 하려고 하냐고, 돈 안되는 데 하지 마라고. (웃음) SK텔레콤은 해외 비즈니스의 브리지를 생각한 것 같다. 현재 갖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위해서라도 글로벌로 가야하는데 CG로 먼저 진출한 다음에 그걸 교두보로 가는 게 전략적으로 효율적이라고 봤을 것이다. (정성진) 한국의 CG업체들이 가진 가능성도 보았을 것이다. 나름 탄탄한 기술력과 재능이 있는데, 사실 아직 해외쪽 기술과 견줄 만한 일이 없었다. 재능을 판단하고 전망을 볼 때, 아직 남아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거다. SK텔레콤 입장에서도 우리를 인수한 뒤 몇년간 수익을 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았을 것이다.
-인터파크쪽 입장도 비슷한 건가. (이윤석) 좀 다르다. 물론 우리가 그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CG만 가지고도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본 것 같다. 이런 이야기는 했다. 한국 배우와 감독을 수출해서 사업적으로 성공하는 확률에 비해 CG로 진출해서 성과를 내는 게 더 수월하지 않겠냐고. CG는 국적이 없다. 오로지 기술이다. 문화적인 갭이 없다는 점에서 시장의 확장성을 크게 본 것 같다.
- 주변의 영화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 (이윤석) 김용화 감독은 진작 이랬어야 했다고 하더라. 큰 작품을 하려고 해도 기존의 회사 규모에서는 어려운 게 많았으니까. 그리고 필요 이상의 과당경쟁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감독들은 한국의 기술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웨타나 ILM을 가기에는 너무 비싸지 않나. 말하자면 그에 견줄 수 있는 CG스튜디오가 한국에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더라.
-다른 CG업체들이 어떻게 바라볼지도 궁금하다. 어떤 목적에서 합병을 했든 간에 메이저가 된 것 아닌가. (이윤석) 개소식에 초대는 다 했다. 한 업체만 화환을 보냈다. 우리가 그쪽 입장이어도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다 독식하겠다고 이런 회사를 만든 건 아니다. 사장님이 그러더라. 메이저일 수 있지만 자칫 깡패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합병 전보다 경쟁업체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거나 풀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그러지 않으면 박살난다고 하셨다. (웃음) (강종익) 우리끼리도 협력을 강화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큰 작품이 들어온다고 해서 다하는 게 아니라 다른 회사랑 나누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업무를 진행할 때 세 회사의 직원들이 어떻게 엮이게 되는가. 저마다 갖고 있는 특징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강종익) 우리가 합친다고 하니까 절대 섞일 수 없을 거라는 추측을 하더라. 결국 3개의 계보로 가지 않겠냐는 시선이다. 하지만 한 회사가 되면서 작업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고민했다. 본부는 3개로 나뉘었지만, 같은 일을 하는 다른 본부가 아니다. 각각의 본부장들이 갖고 있는 능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쪽으로 나누었다. 이윤석 본부장이 마케팅쪽 책임자라면 내가 제작본부 책임자고 정성진 본부장은 슈퍼바이저쪽 책임자다. 서로의 영역이 중복되거나 섞여서 가지 않게 했다. (정성진) 실무급에서는 자기들이 알아서 원활한 업무 관계를 만들기 위해 정리를 해줬다. 예를 들어 사용하던 툴도 다 통일시키더라. (이윤석) 우리가 합치는 걸 수학이나 물리로 설명할 수는 없다. 화학에 가깝다. 서로의 색깔을 맞추는 준비는 세 본부장이 꼼꼼히 했다. 합병 전부터 실무자들이 워크숍을 하면서 시스템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가 지시를 내린 게 별로 없다. 그들이 알아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아이디어를 만들었는데, 결국 그게 제일 좋은 아이디어였다.
-합쳐놓고 보니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이윤석) 현재 직원 수로 따지면 90명이 넘는다. 연말까지 120명에서150명으로 늘릴 거다. (정성진) 이렇게 합치기는 했는데, 합치면 뭐가 낫냐는 말들을 하더라. 예전에는 회사마다 20, 30명 정도의 인력이 있었다. VFX를 사용하는 영화가 많지 않다보니 그 정도가 맥시멈이었다. <국가대표>는 30명이 3개월을 작업했는데, 원래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 적어도 150명 정도가 6개월 정도 꼼꼼하게 작업을 해야 한다. 세 회사가 합치면서 체력이 늘었다. 이제 한팀을 10명에서 20명 내외로 꾸릴 수 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새로운 것도 찾아낼 수 있고 퀼리티도 높일 수 있다. 업종으로 분류하자면 우리는 서비스 업체 아닌가. 이 정도의 시스템을 갖추어야 퀼리티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덩치가 큰 만큼 더 많은 일을 받아야 한다는 거 아닐까. 하지만 현재 한국영화산업아 이 정도의 스튜디오를 이끌 만한 상황이 될까. 결국 해외 프로젝트를 겨냥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윤석) 일단 우리는 내수 탄탄주의다. 외국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의 필모그래피가 결국 다 내수작품 아닌가. 해외쪽은 일단 신중하게 보고 있다. 운좋게 나갔다가 안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만 욕먹는 게 아니다. DTI가 <포비든 킹덤: 전설의 마스터를 찾아서>를 했을 때는 단가 면에서 경쟁력이 있었다. 이제는 단가경쟁으로도 중국과 홍콩에 밀릴 거다. 단가 외에 해외에서 매력적으로 볼 만한 부분을 잘 가꾼 뒤에 시도해봐야 할 문제다. (정성진) 각 회사가 주특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걸 다 모으면 결국 백화점이 돼버리는데, 이게 좋은 게 아니다. 할리우드로 시장을 넓히려면 연구개발이 필수다. 기본적으로 가진 기술이 있지만, 한국에 있는 스튜디오가 할리우드의 미들급 스튜디오가 할 수 있는 퀼리티만 하는 게 아니라, 할리우드 내에서도 소수만이 할 수 있는 걸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해외의 CG스튜디오들 사이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텐데. (강종익) 해외의 경우, 중간급 스튜디오들은 거의 무너졌다. 웨타는 직원이 1천명이 넘는다. ILM은 1천명에 육박하고. 그에 비해 비슷한 규모였던 디지털 도메인이나 소니이미지웍스는 아예 시장에 내놓은 상태다. 예전에는 200명에서 500명 되는 규모의 스튜디오가 많았는데, 금융위기가 오면서 사라진 거다. 예를 들어 <300>은 중간급 스튜디오에서 하는 게 맞다. 우리가 기회로 본 게 그 틈새다. 얼마 전 한 일본 프로듀서가 찾아왔는데, 더이상 미국에 갈 필요없이 여기에 와서 배우면 되겠다고 하더라. (이윤석) 앞서 말한 연구개발 능력이 중요하다. 상업적인 접근을 하자면 VFX쪽을 밀고 가는 게 맞다. 디지털 매트페인팅이나 합성쪽과는 단가가 다르다. 하지만 솔직히 디지털 캐릭터가 등장하는 VFX는 할리우드보다 약하다. 그런데 이렇게 보자. 한국영화 중에 <괴물> 말고 캐릭터가 나와서 설쳐대는 영화가 없지 않았나. 그런 기술을 시도해볼 프로젝트도 없었지만, 별도의 테스트 필름을 만들어볼 여력도 없었다. 이제는 체력이 생겼으니, 실험을 해보려고 한다. 일단 동서대학교와 일종의 산학협력을 하기로 했다. 웨타는 웨타디지털과 웨타워크숍으로 나뉘어 있다. 웨타디지털은 우리처럼 VFX를 메인으로 하는 곳이고, 웨타워크숍은 설계와 연구개발을 하는 곳이다. 그런 모델을 함께 가져가려고 한다.
- 디지털 아이디어의 공식적인 첫 창립작은 무엇인가. (강종익) 처음으로 크레딧을 달고 나오는 건 <이끼>가 될 거다. (이윤석) DTI에서 디지털 아이디어로 가는 중간단계에서 작업한 작품이다. 크레딧을 뭘로 넣어야 할까 우리끼리 고민했었다. 결국 계약서는 DTI로 썼지만, 크레딧은 디지털 아이디어로 넣기로 했다.
- 그외 작업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정성진)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 장훈 감독의 <고지전>을 프리 프로덕션 중이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도 하고 있고, <초능력자>도 있다. 할리우드쪽으로도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기는 한데, 아직 결정된 사안은 아니다.
- 나름 좋은 시스템으로 합병을 했지만, 두려운 건 없나. (정성진) 지난 13년 동안 걱정만 했었다. (웃음) 내 일을 제대로 못했다. 퀵서비스 비용이 얼마나 나왔는지 살피고, 야식비가 한달에 300만원씩이나 나와서 그만 좀 먹으라고 하는 게 주 업무였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반지의 제왕>처럼 CG를 보고 들어온 해외프로젝트들에 한국의 촬영감독과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함께 가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제는 별 걱정이 없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강종익) 나도 이제 직원들 월급을 직접 입금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다. (웃음)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에 맞는 결과물을 보여줘야 하는 부담감은 있다. 우리를 믿고 이 상황에 투자를 한 모회사도 있지 않나. 곡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들에게 본전이라도 안겨줘야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줄 수 있을까란 고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