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죠?” 소년의 마지막 말조차 아버지에겐 닿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말을 풀어놓는 동안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이윽고 대화 아닌 전달이 끝나고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묻어 있는 지치고 두려운 표정.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 장면은 이웃집 거실이 아니라 드래곤과 바이킹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벌크섬 족장의 집에서 일어난다. 나는 확신한다. 드림웍스의 새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가 관객과 교감하는 순간은, 히컵의 아버지 스토이크의 얼굴에 묻어 있고 상처입은 드래곤 투슬리스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섬세하고 익숙한 표정에서 출발한다고. 드림웍스의 야심은 <아바타>의 이크란 비행신마저 능가한다고 평가받는 드래곤의 아름답고 역동적인 활강장면에 있었을지언정 이 장면을 쉽게 휘발되는 쾌락으로 소비되지 않도록 만드는 힘은 추상적 움직임이 품는 현실과의 유사성에서 기인한다. 그것이야말로 드림웍스가 한동안 잊고 있던, 애니메이션이 가진 마법의 원천이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설명하지 않는다
언어는 단어와 단어 사이로 기표적 의미를 흘린 채 불완전하게 전달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형용사가 구체적일수록 본질에서는 멀어지고, 말이 많아질수록 오해는 쌓인다. 본질은 설명하는 영역이라기보다 감각하는 영역에 가깝다. 히컵이 자신이 쏜 그물에 맞고 쓰러진 투슬리스를 차마 죽이지 못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두려움은 미지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겁이 많고 육체적으로 나약한 히컵은 사냥과 용맹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바이킹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존재다. 히컵과 아버지는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버겁다. 최고의 바이킹인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마을의 문제아로 낙인찍힌 그는 소외에 대한 두려움과 상처를 하루하루 실감하며 살아간다. ‘나이트 퓨어리’가 공포의 상징인 이유 역시 아무도 그 모습조차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이트 퓨어리’가 자신의 그물에 잡혀 두려움에 찬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볼 때, 그것은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아버지와도 마주 보지 못했던 히컵이 공포의 상징인 드래곤의 얼굴을 직시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 교감의 순간에는 어떠한 언어도 요구되지 않는다. 단지 흑표범을 모티브로 했다는 투슬리스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동작에서 비롯되는 리듬감은 히컵뿐만 아니라 관객의 경계심마저 무장해제해버린다. 이 순간 우리는 영화가 세계를 해석하고 대응하는 주체가 되기 이전, 그것이 단지 움직임에 대한 놀라운 구경거리였던 시절에 품었던 근원적인 환상의 흔적과 마주한다.
애니메이션의 생명력은 영화가 멜리에스의 판타지와 뤼미에르의 리얼리즘으로 갈라지기 전 머물렀던 그곳, 재현 이전의 좀더 근원적인 환영 속에 자리한다. 영화가 아직 타자와의 형상을 대면하는 장소가 아니었던 그때, ‘움직이는 그림’으로서의 영화(映畵)는 움직임에 대한 환상적 도취였으며 현실의 그림자여도 좋은 흔적의 공간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재현이 아닌 표현 층위의 작업이기에 재현의 윤리에 묶여 있지 않아도 좋은 자유가 있다. 그것을 애니메이션이 가진 환상성이나 표현의 자유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을 방만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표현하지 않아도 좋은 자유이다. 보이는 것 이상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제한된 움직임의 표현은 허락된 감각의 공간에서 되살아난다. 최근 픽사의 <월·E>에서 시도한 방식에는 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다. 본질의 그림자를 감각하는 유희 안에서 완전하고 순수하진 움직임은 은유가 아닌 직유의 방식으로 관객과 곧바로 접촉할 수 있다.
사실 <드래곤 길들이기>는 픽사의 <월·E>가 보여주었던 초기 영화의 마술적 매혹(“그래픽, 포토그래픽에 작별을 고하다”, <씨네21> 715호)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마술적 움직임에 비해 훨씬 정형화되고 거리감있는 서사 방식을 취한다. 많은 평가를 통해 이미 이야기되었듯 이 영화는 전혀 새로운 형식에의 도전이나 참신한 실험, 혹은 새로운 영화언어의 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극히 익숙하고 관습적인 것들의 차용이며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의 조합에 가깝다. 소년과 미지의 생물과의 우정에 관한 영화는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실제로 영화 곳곳에서 <E.T.>나 <검은 종마>와 같은 작품에 대한 오마주도 발견할 수 있다.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강대한 외부의 적을 설정하는 방식 또한 거부감없이 흔히 유통되는 서사 양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형적 서사가 인트루 3D라는 혁신적인 영상기술과 결합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사이 모종의 균열을 감지할 수 있다.
3D는 영화 아닌 영상
<드래곤 길들이기>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 복제를 반복하던 드림웍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드림웍스는 그동안 현실에 대한 직접적 모사를 바탕으로 한 전복적 상상력을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이러한 드림웍스의 전략은 달리 말하자면 애니메이션 고유의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차별화로부터 출발한다. <슈렉>이 시도한 역발상은 참신하지만 기존의 세계관, 이를테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구축해놓은 가치들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시점에서 그것은 이미 매너리즘 안에 있다. 상상력의 가능성을 역으로 제한한 전복적 가치에 갇혀버린 드림웍스는 이제 <드래곤 길들이기>를 통해 애니메이션의 본래적 가치 혹은 전통으로 회귀를 시도한다. 성장과 소통이라는 메시지는 그것 자체로 드림웍스가 시도한 형식적 변화와 연계된다. 그러나 여기에 그친다면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관습적 영화의 재생산에 다름 아닐 것이다. 드림웍스가 드디어 이와 같은 고전적 서사로의 회귀를 당차게 시도할 수 있었던 원인은 리얼 3D라는 기술의 탄생에 힘입은 바 크다. 그것은 차별화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드림웍스에 효과적인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시네마틱한’ 경험 차원에서 3D를 비롯한 첨단 영상기술들은 논쟁적 화두를 던진다. “최근 디지털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영화는 라이브 액션 녹화분을 구성의 일부분으로 사용하는 애니메이션의 일종이 되었다”는 레프 마노비치의 지적처럼 디지털 기술은 종종 영화가 사진적 영상으로부터 비롯된 재현의 윤리에 관한 고민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마저 지워버린다. 3D 기술 역시 재현과 표현의 경계를 허물어 관객에게 주체와 거리의 감각을 교란시킨다. 하지만 재현이 아닌 표현으로의 애니메이션은 이와 같은 문제에서 자유롭다. 아무도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을 보고 현실의 연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현실의 그림자이며 허락된 환상의 세계다.
애니메이션에 있어 디지털 이미지건 아날로그 이미지건 그것은 단지 표현 방식의 차이에 불과하다. CG가 허락한 극한의 사실적 묘사는 한없이 현실에 가깝게 수렴되지만 그것은 반대로 결코 현실이 아님의 방증인 것이다. 따라서 <드래곤 길들이기>에서는 3D 영상 또한 효과적인 영상기술 그 이상의 의미를 점유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애니메이션 특유의 고전적 아름다움은 3D라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촉발되는 스펙터클의 쾌감마저 지지할 수 있는 튼실한 받침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종적으로는 당대 영상기술의 혁명이라는 <아바타>의 3D와 비교되고, 횡적으로는 영화 이전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본질과 그 끈이 맞닿아 있는 <드래곤 길들이기>는 그렇게 3D 영상이 단지 마술적 환영의 연장임을 이해 시켜주는 하나의 좌표가 된다. 결국 허락된 마술의 세계에서 투슬리스의 실감나는 표정에 공감한 관객은 비로소 드래곤의 등에 업힌 환상적인 비행을 하나의 체험으로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 영화(映畵)라는 아이스크림 위에 얹은 3D라는 달콤한 체리를 음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