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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영화의 힘, 기적의 체험

이창동의 미적 욕망과 도덕적 의무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는 스포일러가 영화에 대한 체험을 ‘완전히’ 망칠 수 있습니다.

나는 가라타니 고진을 언급하며 글을 시작해 어느 정도 작성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창동의 도덕’(<씨네21> 제753호)을 보면, 정한석 역시 <>를 보며 가라타니 고진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그는 친절하게도 (내가 작성해두었던) 공동체의 도덕을 버티고 서려는 이창동과 그것을 넘어 윤리의 차원으로 나아가려는 고진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도 빼놓지 않고 있었다. 방향의 전환, 그리고 글의 수정. 나는 <>에 대한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을 때, 자뭇 궁금하면서도 풀지 못할 것 같아 접어두었던 어떤 의문이 하나 있었다. <>는 대체로 단선적인 내용에 명료한 숏들로 구성된 작품임에도, 그 내용과 형식 사이에는 어떤 균열이 순간순간 돌출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내가 이러한 의문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시의 도덕을 이야기하려는 영화의 기본적 태도에서 어느 정도 비껴나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창동은 세상의 아픔에 눈길을 돌린 채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는 행위를 완곡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창동의 인터뷰 내용을 참고하자면, 그것은 철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창동이 영화 곳곳에서 대상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향해 눈을 흘깃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러한 미적 태도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도덕 안에서 시의 역할을 찾으려는 이창동의 영화적 태도와 충돌한다는 점에서 쉽게 무시해버릴 문제는 아닌 거 같다. 난 <>의 이러한 균열을 만든 원인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을 따라가기에 <>는 너무도 풍요로운 작품이다. 넓게 에둘러 그에 관련된 몇 가지 관심사를 따라가면서 균열의 흔적에 접근해볼까 한다.

참을 수 없는 연민의 가벼움

이창동이 그려낸 공동체의 세계, 그러니까 소녀의 자살과 ‘연루’된 학부형들의 모습은 무척 ‘평범’하고, 그렇기에 ‘신랄’하다. 내가 말하는 평범은 당신과 나의 평균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최문순 의원이 카메오로 출연한 교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아들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학교의 명예를 위해(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지극히 평균적으로 행동한다. 학부모들은 소녀의 자살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견을 모은다. 놀랍다. 경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합의가 잘 이뤄지는 모임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이면이 없는 투명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소녀의 자살에 대처하는 자세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되고, 그럼으로써 이 시대의 도덕이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확인하면 된다. 즉, 그들에게는 어떤 사태에 대처하는 이 시대의 ‘합의된 태도’가 드러나는데, 이창동이 보기에 그것은 ‘나’와 ‘가족’에 매몰되어버린 시대다. 공동체의 도덕은 가족에 짓눌려 압사당하기 직전이다. 실제로 미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소녀의 자살에 대해, 그리고 그 어머니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갖지 않는다. 오직 미자만이 소녀가 머문 길을 따라가며 그녀의 고통에 눈물 흘린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좀 이상하다. 내가 ‘볼’ 때, 지금의 한국사회는 연민이 과잉된 사회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희생에 대해 집단적인 연민의 표출을 즐기려는 시대라는 거다. 시대의 공통감각과 무관하지 않은 ‘연민(또는 애도)의 유행’. 그런데 <>는 그 반대로 지금의 한국사회를 연민이 부재하는 시대라 말하고 있다. 과잉된 연민(현실)과 부재하는 연민(<>) 사이의 간극. 그렇다면 이러한 간극은 왜 발생한 것일까? 미리 밝히고 싶은 사실은, 나는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연민의 힘을 의심하는 쪽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는 연민이 대상을 타자화했을 때만이, 그러니까 그 대상이 나와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수잔 손탁의 지적처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러한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낀다. […]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동일한 타자의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연루된 것임을 자각하는 순간 연민은 설 자리를 잃는다. 연민의 연약함. 이창동은 현 시대의 연민의 과잉을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집단적 연민의 표출은 어떤 망각, 즉 우리와 대상간의 ‘연루 가능성’을 무의식적으로 괄호 속에 집어넣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창동은 그 괄호를 벗기고자 한다.

영화 초반부 뉴스 화면에서 아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인의 울음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자는 낮에 병원에서 자살한 소녀 어머니의 절규를 보면서 팔레스타인 여인을 보듯 연민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자는 이내 여인을 절규하도록 했던 슬픔의 원인에 자신이 연루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이건 미자에게는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그녀는 가슴속 응어리를 다른 사람과 나눠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걸 나누려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을 것이다. 말로는 딸과 친구처럼 지낸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정작 자신의 고통은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은 정작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녀는 타자의 고통을 떠안아야 한다. 그것도 가해자로서 말이다. 이창동은 괄호 속에 은닉되어 있던 ‘연루 가능성’을 끄집어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즉, 당신이 타자의 고통에 연루되어 있을 때에도 이를 연민으로 감싸고 이해할 수 있겠냐고 말이다. 결국 이창동이 우리에게 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타자의 고통과 우리가 연루되어 있을 때, 너무도 쉽게 철회되어버리는 연민의 연약함, 그리고 그 연약함을 ‘즐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창동이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부정하거나 버리려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이창동은 그 반대다. 이창동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의 나룻배를 타고 그것을 건널 수 있으리라는 믿음까지는 철회할 생각이 없다(연민이라는 말이 걸린다면 타자에 대한 이해 가능성 정도로 바꿔 읽어도 좋다). <밀양>을 생각해보라. 사건의 피해자였던 신애(전도연)의 고통이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연민의 문턱을 넘어설 때, 우리는 타자의 고통과 우리의 연민(또는 이해 가능성)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창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덧붙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창동은 인물이 탈진하고 쓰러질 때까지 절망적인 심연을 보여준 뒤, 그것을 뒤집진 못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비밀스러운 한 줄기 빛을 덧붙였다. <>에서 이창동이 말하는 ‘아름다운 시의 도덕’은 이 순간, 기적을 만든다.

이창동은 관객이 그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영화이자 아름다움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아름다움이 타자의 고통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시가 그 고통을 대면한 뒤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는 영화가 <>인 셈이다. 정한석이 지적했듯이, <>의 도덕만 보는 것도, <>의 아름다움만 보는 것도 모두 틀린 감상법이다. 왜냐하면 <>는 “아름다움과 도덕 사이에서 꺽꺽 울음을 터트리는 미자”에 관한 영화(송경원)이자, “아름다운 시가 얼룩진 도덕의 사태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정한석)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다. <>는 아름다움의 영역에 속한 이창동이 곤경에 처한 공동체의 도덕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묻는 영화라고 말이다. 즉, 이창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영화감독으로서) 자기 역할을 묻고 있는 거다. 하지만 현실에서 두 세계는 단절되어 있다. 즉, 시를 배운다는 미자의 말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에서처럼, ‘공동체의 세계’와 ‘시의 세계’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학부모들이 처음으로 모이는 장면에서 미자는 식당 바깥으로 나가 꽃을 감상하며 시상을 떠올린다. 꽃말이 방패인 맨드라미. 남루한 현실이 범람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침범하는 것을 막는 방패로서의 시. 미자의 웃음도 그렇다. 미자는 버릇처럼 늘 웃는다. 그녀의 웃음은, 그리고 화사한 옷차림은 비루한 현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방패다. 때로 아름다움은 현실을 외면한 대가로 자신의 순수성을 지속시키는 법이다. 미자가 소녀의 어머니를 설득하려 찾아간 장면이 대표적이다. 아름다움에 매혹된 그녀는 자신의 도덕적 책무를 잊는다. 인터뷰에서 이창동은 이를 ‘철없는 짓’이라 말한다. 미자는 손자 뒤에서 질책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위치에 서 있지만, 이제 소녀의 어머니로부터 힐난의 시선을 받아야 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창동은 이를 철없다고 말한 거지, 시(poetry)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창동은 그것이 시의 한 유형임을 인정하지만, 이를 지지할 수는 없다고, 나의 영화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의 영화 제목이 화면에 새겨지는 순간은 이창동의 자기 다짐처럼 보인다. 이창동은 강물을 떠내려 온 소녀의 시체 옆에 ‘시’라는 제목을 새긴다. 이는 여러 은유적 의미(가령, 시의 죽음 등)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난 화면에 나타난 것 그대로 읽고 싶다. ‘시는 소녀의 시체 바로 옆에 있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타자의 고통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는 이창동의 자기 다짐. 그것이 이창동이 자신의 필체로 ‘시’라는 글귀를 화면에 새긴 이유일 것이다. 이 오프닝은 엔딩과 함께 이야기할 때 완전해질 수 있다. 영화는 서사의 시작 직전, 그러니까 소녀가 강물에 몸을 던지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아녜스의 시를 낭독하던 미자의 목소리가 소녀의 목소리로 전환될 때, 소녀의 목소리는 나를 온몸으로 반응하게 하는 기적의 순간이다. 그리고 철교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던 소녀가 뒤돌아 관객을 바라보도록 한 뒤, 그녀의 시체가 사라진 평온한 강물을 보여줄 때, 소녀는 신체 없는 목소리가 아닌 살아 있는 육체성을 부여받는다. 이창동은 관객이 그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마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에서 소아마비 딸이 땅 위를 걷는 듯한 기적이 오직 관객의 체험에서 가능했던 것처럼, 이창동은 그 기적의 순간에 관객의 감각이 반응할 것을 호소한다. 나와 타자의 암담한 심연을 건너는 기적의 순간은 영화 속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적은 설명이 아닌 체험될 때만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이 믿는 영화의 힘은, 그것이 관객의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Kino-eye, 영화의 시적 아름다움

“나는 키노-아이(kino-eye)다. 나는 기계의 눈이다. 기계인 나는 당신에게 나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를 보다 보면 그 다짐의 절심함이 느껴지면서도 그것이 흔들리는 어떤 균열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를 처음 볼 때보다 두 번째 볼 때 그 균열은 좀더 커졌다 (정한석도 균열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는 내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균열은 이창동이 시가 비루한 현실을,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때 진실로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미적 무관심성’의 태도로 대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할 때 발생한다.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는 아름다워진다. (단순 무식하게 말하자면) 미적 무관심성은 대상에 대한 진리, 도덕, 유용성 등을 괄호 안에 넣어둔 채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창동이 철없는 짓이라고 불렀던 미자의 행동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즉, 이창동 자신이 완곡하게 비판했던 철없는 짓에 정작 자신이 매혹되는 순간이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에서 ‘보는 행위’는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이창동이 이야기하는 ‘봄’이 단지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시각적으로 보는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간주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화 속 ‘본다’의 의미는 닫혀 있는 나의 감각을 여는 행위, 그러니까 대상이 주는 모든 자극을 남김없이 감각적으로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태도에 가깝다. 바람을 피부로 느끼는 것, 나뭇가지와 잎새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 심지어 자신을 향하는 누군가의 시선에 가슴이 찌릿해짐을 느끼는 것도 일종의 ‘봄’인 셈이다. <>는 우리의 감각에 호소해 갑각에 둘러싸인 우리의 감각을 되살리려 한다. 현 시대는 감각의 알츠하이머에 시달리는 시대다. 이창동이 관객의 감각을 되살릴 ‘봄’을 위해 고민한 결과는 영화의 내용이 아닌 ‘시적 형식’의 영화다. 그런데 <>의 시적 형식은 관객의 시선을 끌기 위해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볼거리를 전시하고, 낭만적 우수가 깃든 분위기나 화면의 여백을 만들고, 서정적 음악을 깔고 하는 상투적인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이창동은 단순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관객의 감각에 호소하는 시적 형식의 영화를 만들었다. <>는 어떤 대상이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순간에 시적인 감흥이 느껴지는데, 이때 이창동의 숏은 무척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방식으로 대상을 담아 우리 시야 앞에 불쑥 들이미는 느낌을 준다. <>에서 가장 시적인 순간은 노트 위에 빗물이 떨어지는 순간이다. 소녀가 떠내려간 강가에 도착한 미자는 공책을 꺼낸다. 그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때 이창동은 노트의 빈칸 위로 떨어진 빗물이 번지는 순간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노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전부다. 하지만 우리가 그 순간이, 그리고 빗물이 쓴 시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빗물이 소녀가 흘리는 눈물의 은유처럼 느끼기 이전에, 종이 위로 번지는 빗물의 ‘물질성’ 자체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미적 무관심성). 어떤 대상을 무언가의 은유로 읽는 것은 우리가 그 대상을 ‘본’ 뒤에야, 그러니까 대상이 주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감각이 열려진 뒤에 가능한 일이다. 이창동이 창출한 시적 아름다움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카메라 눈) 선언에서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는 어떤 대상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괄호 속에 집어넣고) 자신의 물질성을 드러낼 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든다. 유사한 맥락에서 정한석은 때로는 시가 쓰이고, 때로는 협박의 문자가 쓰이는 노트를 클로즈업하는 숏의 활용이 주는 감각적 자극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 순간을 찬란하다고까지 극찬한다. 실제로 앞서 내가 언급한 빗물장면에서처럼, 노트의 클로즈업은 갑자기 시야에 툭하니 끼어드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숏 자체가 감각적 호소력이 있다(그 순간마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나 시가 어떤 운을 맞추는 듯한 느낌까지도 함께 자아낸다). 나는 흐름을 툭 끊고 들어와 숏 자체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숏의 활용 역시 ‘숏의 물질성’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순간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 안에서 절실히 싸우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아름다움이 (도덕이나 그 밖의 다른 것들을 괄호 속에 집어넣은 채) 온전한 미적 무관심성을 통해 발견되는 사례들에 해당한다. <>는, 그리고 이창동은 시가 도덕을 향할 때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도덕 없이도 아름다울 수 있는 순간, 그러니까 미적 무관심성이라는 철없는 짓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반복적으로 흘깃거린다. 물론 앞서 언급한 영화의 엔딩이나, 시 낭송회에서 음담패설을 일삼던 형사가 자신이 읊었던 시 속의 연탄재와 같은 가장 따스한 사람이 되는 순간처럼, 시와 도덕이 만났을 때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눈흘김이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균열은 이창동이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즉 애초에 대상의 아름다움 자체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창동이 무의식적으로 무관심성의 아름다움에 이끌린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창동이 도덕을 향해 자신의 발길을 돌려 세우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에 저항하려는 의식적 차원의 행위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이 지속적일지까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그는 <> 안에서만큼은 절실히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이런 거다. 왜 이창동은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억누르면서까지 도덕적 영역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에서 이창동의 자기 반영적 성격이 드러난다고 했을 때, 이 작품이 누군가의 고통에 가해자로서 연루된 자에 대한 영화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이창동은 미자에게 요구했던 사건에 연루된 자로서의 도덕을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자가 사건에 연루된 자로서 시의 도덕을 완성했듯이, 이창동 역시 이 시대의 비도덕과 자신의 연루 가능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균열을 감수하면서까지 <>의 도덕을 버티고 서는 것, 그것이 바로 이창동의 도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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