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0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 심사위원장인 황규덕 감독 외 4명의 심사위원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희문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 지원사업 심사과정에서 “불공정한 외압을 자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심사위원들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특정접수 작품을 강요했다”고 한다. 심사가 진행된 5월12일부터 18일까지 칸국제영화제 참석을 위해 해외출장 중인 조 위원장은 국제전화를 통해 “내부조율이 필요하다”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며 심사위원들에게 “접수작품 번호까지 직접 불러줬다”는 것이다. 심사위원장이던 황규덕 감독은 구성주(감독), 이미연(감독·영진위 위원), 허욱(용인대 교수), 어지연(프로듀서) 등 심사위원 4인과 함께 5월20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조 위원장의 행위는 심사위원 9인 모두에게 인격적으로 불쾌함을 주었으며, ‘공정 심사’란 대의명분에 실로 중대한 도발이었다”며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기 위한 주무관서의 대책 혹은 방지책, 위원장 본인의 ‘공식사죄’를 정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영진위의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은 연간 6억4천만원의 예산이 투여되며,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한다. 순제작비 5천만원 미만의 단편영화, 순제작비 2억원 미만의 장편영화, 다큐멘터리 등이 지원대상이다. 지난해 동사업의 심사를 맡은 허욱 교수는 “대개 심사위원장을 정한 뒤 회의를 통해 심사조를 나누는데 올해는 영진위쪽에서 조를 미리 정해줬다. 수상하다는 낌새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 위원장에게 처음 전화를 받은 건 5월14일이었다. 밸런스 이야기를 하기에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는데 ‘곧 알게 될 거다’하고 전화를 끊었다”면서 “불쾌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특정 작품을 언급하지 않아 무시하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조 위원장의 청탁전화는 이튿날인 5월15일에도 계속됐다. 이날은 9인 심사위원들이 특정장르 부문 예심 통과작을 최종 선정하는 날이었다. 허 교수는 “토론 중에 다들 전화를 받고 자리를 떠야 했다”면서 “나 또한 전화를 받았는데 작품번호와 작품제목을 명시한 뒤 해당작품이 꼭 통과할 수 있게끔 부탁한다고 조 위원장이 말했다”고 했다.
심사 기간 중 수차례 전화한 목적은?
5월20일 기자회견에는 심사위원 중 절반이 조금 넘은 5인의 심사위원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 위원장의 불공정한 외압행위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반발의견은 9인 모두 일치한다. 개인적 일정상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한 조재홍(감독·서강대 교수), 문관규(부산대 교수), 김석범(수원대 교수), 장민홍(서경대 교수) 등 4인의 심사위원도 기자회견에 나선 심사위원들과 함께 조 위원장의 외압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은 내용증명에 서명했다. 이 서류는 5월14일 조 위원장과 문화체육관광부에 발송된 상태다. 황규덕 감독은 “기자회견 개최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했다. 하지만 최종심사를 끝내고 귀가하는 길에 조 위원장의 전화를 받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해외에서도 저렇게 하는데 한국에 오면 회유하고 압박하고 물타기하려 들지 않겠나. 그러다 보면 공정하게 심사한 우리만 뒤통수 맞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외압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주장에 맞서 조 위원장도 5월20일 광화문 영상미디어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다큐멘터리 2편과 장편영화 1편을 지목했느냐는 질의에 대해 그는 “몇몇 작품이 1차 심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느냐고 물어보고, 또 후보에 들어갔냐고 확인한 정도다. 그런데 목록에서 없다고 하기에 좀 수정이 안되냐, 좀 살펴봐줄 수 없느냐고 문의했다. (외압인지 아닌지는) 말을 듣는 사람과 하는 사람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조 위원장은 또한 “내가 전화했을 때는 이미 심사가 지났을 때였다”면서 “심사위원들이 스스로 (내 전화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심사 결과 또한 공정했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느냐”고 덧붙였다. “본의와 다르게 심사위원들에게 심려를 끼친 것은 유감”이지만 “작품선정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심사가 진행됐으니 양해해달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의 해명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개인적 관심에 따른 부탁, 심사와 관련한 통상적인 연락이었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조 위원장의 말대로라면 이 경우 통화는 한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조 위원장에게서 심사기간 수차례 전화를 받아야 했다. 황규덕 심사위원장은 “한 심사위원은 한번 더 조 위원장의 전화를 받을 경우 사퇴하겠다는 뜻을 내게 전했다”고 말했다. 허욱 교수도 “조 위원장이 거명한, 이미 떨어뜨린 작품을 결국 두려움 속에서 다시 꺼내보게 됐고, 이 과정에서 실소를 금치못할 상황도 확인했다. 한 작품은 기획서가 불과 5, 6페이지에 불과했고, 또 한 작품은 본인이 직접 출연한 다큐멘터리였다”면서 “선후배, 동종직업에 종사한다고 하더라도 이번 일은 영화인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단의 외압 주장에 나온 5월 20일 조희문 영진위 위원장이 광화문 영상미디어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내 의견이 반영 안 된 건 심사가 공정하단 증거”?
심사에 개입한 조 위원장의 부적절한 처신도 문제지만 그에 앞서 한국영화의 진흥사업을 책임지는 이로서 책무를 망각하고 독단적으로 기구를 운영하려는 태도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내 의견이 실제 반영되지 않았다는 건 오히려 결과적으로 심사가 더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됐다는 게 아닌가 싶다”면서 “심사위원들이 이런 상황을 정말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 그 상태에서 심사를 중단하고 의견표명을 하는 게 더 정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 위원장의 이같은 발언은 상반기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이 이미 문화체육관광부의 사업승인이 늦춰지면서 애초 일정보다 한달 반가량 늦춰졌고, 지원편수 또한 무려 304편에 달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 이미연 위원은 “조 위원장의 외압 전화를 받고 나서 심사를 작파하자는 견해가 내부적으로 없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다른 지원자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컸고, 그래서 일단 심사를 마무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진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면 접수발표 전까지 심사와 관련한 일체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쓴다. 이번 경우 심사위원 9인은 공정한 심사진행을 위해 합숙까지 했다. 정작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고 룰을 어긴 것은 심사위원들이 아니라 영진위 위원장이다. “통상적으로 심사를 진행하면 나뿐만 아니라 직원들까지 이런저런 연락을 받는다. 자신이 지원하는 심사나 관심있는 사업에 대해서 누구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거다. 하지만 이 건에 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 연락은 자르거나, 피하거나, 무시하면 그만이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심사위원들이 말한 것처럼 위원장이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여겼지만 무시했다는 것 아닌가. (압력이나 의견표명을 행사)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반영되었느냐 안되었느냐, 그것이 영향을 주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이같은 발언을 심사위원들이 요구한 사죄라고 여길 수 있을까. 앞으로도 꾸준히 심사과정에 개입하겠다는 발언으로 들리지 않는가.
“지난해 11월 시나리오 공모에 1천편이 응모했다. 지금 심사 중인 기획개발비지원사업은 500개 프로젝트가 응모했다. 한국영화 어렵지 않나. 제작환경이 위축된 상황에서 영화인 대부분이 영진위의 제작지원에 의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모 심사는 더욱 중요한 것 아닌가. 최대한 공정하게 심사해서 좋은 작품들이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운영하는 기관의 장이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다.” 구성주 감독이 기자회견 말미에 꺼내놓은 걱정이다. 한 영진위 관계자는 “이같은 시비는 위원장 혼자서 심사위원을 구성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면서 “독립영화 제작지원사업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여타 사업심사 과정에서도 이미 외압 논란이 적잖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영화전용관, 영상미디어센터사업 공모 파행으로 관련 단체들로부터 법정 소송까지 당한 영진위와 조 위원장. 영화계 산적한 현안을 처리하라는 임무와 달리 스스로 영화계의 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