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싸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다. 사무실에 울려퍼지는 박스 굴러다니는 소리와 비닐 테이프 잡아뜯는 소음을 듣자하니 마음이 더욱 심란하다. 그건 짐을 챙겨서 박스에 집어넣는 일의 고단함 때문이 아니다. 포장이사 시스템이 정착된 지금, 짐을 박스에 챙기는 정도가 무슨 일이나 되겠는가. 문제는 책상 구석이나 서랍 깊은 곳에 쑤셔넣어뒀던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아무렇게 방치했던 잡스러운 물건들을 놓고 다시 고민에 빠져야 하는데, 그게 참 못할 짓이란 말이다. 지금은 소용도 없는 수많은 명함, 언젠가 보겠지 하고 사두기만 했던 책, 외국에 다녀온 동료가 사준 (그러나 보존가치는 의심해볼 만한) 기념품, 먼저 회사를 떠난 동료의 ‘유물’, 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굴러들어왔는지 가물가물한 요상한 물건들(이를테면 발모제)까지 튀어나온다. 수년 동안 모아놓은 30여권의 취재수첩은 더 골칫거리다. 하도 갈겨써서 당시에 그 글자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궁금할 정도인 수첩들을 선뜻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혹시나 먼 미래에 회고록 같은 걸 쓰게 되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 0%에 수렴하는 기대 때문이다. 어쨌거나 결국 짐싸기란 무엇을 버릴 것이냐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이렇게 우리가 짐을 싸는 이유는 <씨네21>이 사무실을 이전하기 때문이다. 5월15일 <씨네21>은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떠나 중구 예장동 1-52 대명빌딩으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여러 사정이 있지만 합법 다운로드 업체인 씨네21i와 같은 공간을 사용하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다. 새 사무실의 위치는 남산 1호터널 요금소 바로 앞인데, 가까운 지하철역은 충무로역이다. 그러니 편의상 <씨네21>의 ‘충무로 시대’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영화인들이 충무로를 버리고 떠났지만 우리는 이곳을 지키려 한다, 뭐 이런 식으로 미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충무로 시대가 <씨네21>에 어떤 변화의 상징적 단초를 제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게 된다.
짐을 푸는 일 또한 쉬운 작업이 아니다. 물리적으로만 따지면 짐싸기보다 짐풀기가 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짐을 푼다는 건 결국 새롭게 정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잘 닦은 책상, 텅 빈 서랍과 책장에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돈하는 건 귀찮을지언정 신선한 감흥을 부르게 마련이다. 의욕 또는 희망이라는 말과 어울릴 그 감흥은 이사의 진짜 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짐풀기란 단순히 쌌던 짐을 도로 챙기는 게 아니라 애초 없었던 무언가를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 가깝다.
아직 짐을 싸지 못했다. 무엇을 버려야 할지 아직도 고민 중이다. 그래도 짐을 풀 때의 그 느낌을 생각하면 그리 귀찮지만은 않을 것 같다. <씨네21> 전체로 봐도 충무로에서 짐을 술술술 잘 풀 것으로 기대한다. 이제 나도 슬슬 책상을 뒤엎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