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책을 읽었다. 앞에 앉은 사람들이 책 표지 제목을 보더니 다 내 얼굴을 쳐다봤다. 한두명도 아니고. 밤 11시 지하철에서 <술꾼의 품격> 같은 책을 읽는 여자 얼굴이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술꾼의 품격>은 <한겨레> <씨네21> 기자였던 임범의 에세이집이다.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정말 술꾼이며, 이런 책이 대한민국에서 나온다면 최적의 후보로 자신있게 꼽을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1년 정도 <씨네21>에서 같이 일한 적도 있지만 그와 밥을 먹은 기억보다 술 마신 기억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술의 팔할은 폭탄주였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책 <술꾼의 품격>을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금세 알 수 있는 방법은 이 책의 3장 ‘폭탄주’를 읽어보는 것이다. 3장에는 폭탄주라는 말의 기원과 영어 명칭을 논하는 데서 시작하는 ‘보일러메이커와 <흐르는 강물처럼>’, 한국식 폭탄주의 전형을 보여주는 ‘회오리주의 <플란다스의 개>’, 이렇게 두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중 두 번째 글을 읽어보면 한국 술문화와 폭탄주의 관계를 명징하게 알 수 있다. 회식은 파티와 달리 좌석 이동이 쉽지 않다. 부하직원들 놀라고 마련해놓고는 실제로는 노는 것까지도 상사가 관장하는 피곤한 자리가 될 수 있다. 이런 자리는 어차피 과음을 필요로 하는데, 폭탄주는 공평하게 돌아가니까 상사의 입장에서 술을 덜 마실 수 있고, 제조하고 돌리고 마시고 난 뒤 박수를 치느라 시간을 끌기 때문에 부하 입장에서는 얘기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장점이 있다… 고.
폭탄주 자체가 불유쾌한 한국의 조직문화와 연관있긴 하지만 사실 이 책의 필자는 폭탄주를 누구보다 잘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가치판단은 하지 않는다. 대신 맛있는 폭탄주 제조법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별수 없이 폭탄주를 만들고 돌려가며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술자리에서 늘 할 말 부족으로 곤란을 겪는 사람이라면 각종 술 잡학사전 같은 이 책에서 소소한 화젯거리를 얻을 수도 있겠다. 참고로 이 책은 와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참고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