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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눈 먼 전쟁-기계의 탄생신화

<허트 로커>, 분별력을 상실하는 ‘이라크의 미국’을 그려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캐스린 비글로의 일관된 관심사는 하드보디 마초들이 우글거리는 신화적 남성 세계를 감싸고 도는 험상스러운 파국의 기운이다. 단적으로 영화 <허트 로커>는 ‘이라크전으로 무대를 바꾼 <폭풍 속으로>(1991)’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인데, 극한의 위험 속으로 초연히 걸어가는 수수께끼 같은 사나이와 마력적인 그의 남성성에 동화되는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영화의 바탕은 하나이다. <허트 로커>는 파멸의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자들에 대한 비글로식 탐구의 최신 버전쯤으로 보이는 바, 여기에는 반쯤 맛이 간 무모한 전쟁 중독자(<폭풍 속으로>의 패트릭 스웨이즈의 재림이라고 할 만하다)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캐스린 비글로의 야심은 이라크에서 활약하는 폭발물 제거반 EOD를 이끄는 제임스(제레미 레너)의 스릴 넘치는 오디세이를 좇아 매사에 호전적이고 물러섬이 없는 그의 행동방식으로부터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이다. 과연 <허트 로커>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리댁티드>와 함께 21세기에 나온 가장 새로운 유형의 전쟁영화가 될 만한 자격을 지녔다.

시네마틱하게 조명한 이라크의 미국

<허트 로커>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미국에서는 이라크전을 병풍으로 삼았을 뿐인 탈정치적인 영화라는 견해가 봇물을 이뤘다. 표면적으로는 이라크전을 제재로 차용했으나 그 실질은 이라크의 현실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행 중인 전쟁의 정황에 대한 소상한 맥락화가 부재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이 반쯤은 진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라크의 현실이 부재한 이라크전 영화라는 말이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라면 캐스린 비글로의 전언은 이라크전을 이용해 전쟁의 생태에 대한 뼈저린 각성을 유발하는 것일 터이다. 이 문제작의 주제는 전쟁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해석인데, 여기에 이르면 <허트 로커>는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자켓>과 동류가 되고 만다.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치영화’가 아닌 ‘정치적 영화’로서 <허트 로커>의 가치는 이와는 사뭇 다른 층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영화로서 <허트 로커>의 결론은 무엇인가? 탐욕에 물든 전쟁광들이 미국을 망치고 있다고?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세심하고 다층적인 비글로의 의도를 고려할 때 꼭 들어맞는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마약이다’라고 적시한 도입부 자막은 다분히 의도적인, 일종의 트릭이다. 영화의 주제를 서둘러 발설하고 마는 이 경구는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전쟁만이 아니라 전쟁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로 또는 명시적인 몇몇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전쟁의 중독성에 대한 탐구로 영화에 대한 해석을 유도한다. 이런 해석을 정당화하는 기호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데, 이라크의 미군들은 담배와 술, 유희적 폭력, 쏘고 죽이는 슈팅 게임에 중독되어 있다. 제임스가 고수하는 독선에 가까운 임무 수행 방식을 전쟁의 마성에 중독되어 자제력을 잃은 미국의 초상으로 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이같은 전언은 이 글의 요점이 아니다.

나는 비글로가 좀더 섬세하고 시네마틱하게 이라크의 미국을 조명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트 로커>는 미국이 벌여온 최근의 전쟁들에서 그들 스스로를 곤경에 빠트린 전쟁 지각의 메커니즘을 시네마틱한 담화 방식으로 탐구한다. 테크닉을 다루는 캐스린 비글로의 유려하고 능란한 솜씨가 최상급으로 발휘되는 것은 여기에서부터이다. 삶의 모든 기운이 쇠해진 불모의 전쟁터에서 인식을 주관하는 것은 인간의 눈이 아닌 기계이다. 전장의 병사들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며 기계가 보여주는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허트 로커>는 전쟁터에서 밤낮없이 이루어지는 이미지에 대한 지각과 해석을 텍스트의 비주얼 전략으로 삼아 이라크에서 미국이 겪고 있는 혼란을 굴착해 들어간다. 여기에서부터 <허트 로커>의 진정한 테제,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지각 메커니즘이 봉착한 위기에 대한 예리한 진단이 도출된다.

캐스린 비글로의 대답은 전쟁터에서 상황 인식을 위해 동원되는 지각 장치들의 치명적 한계를 들추는 것이다. 폴 비릴리오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테크놀로지의 진화에 의해 21세기 전쟁이 봉착한 하나의 특이 상황에 대한 진단으로 볼 수 있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일상적인 시각체계와 합치되었던 전쟁 지각 방식은 이미 과거의 유산이 되었고, 현대의 전쟁은 이미지와의 쟁투로 변모한 지 오래다. 총체적인 인식을 저해하는 조각난 파편들, 기계화된 이미지에 의존하여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적들과 싸워야 하는 새로운 전쟁 수행 메커니즘에 의해 눈의 지각능력은 현저하게 무뎌졌다. 퇴화된 지각은 필연코 판단력의 상실을 수반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지각하는 방식의 결함을 묻는 영화로서 <허트 로커>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가는 군인들을 추적한다. 이 영화에서 시야를 혼돈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적의 완악한 교란작전이 아니라 전쟁의 지각체계이다. 그것은 명징한 눈의 지각이 아니라 항공사진과 감시카메라, 폐쇄회로의 기계적인 이미지에 의해 생성된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지각이다. 심지어 실제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때조차 저들의 눈은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전쟁-눈의 작동과 오인

화면이 열리자마자 카메라는 우리의 눈을 공격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소략하게 간추려지지 않는 교란적인 숏. 다소 느닷없이 시작되는 첫 장면에서 우리가 뒤쫓게 되는 것은 ‘REMOTEC ANDROS’라고 불리는 폭탄 탐지 제거 로봇에 장착된 카메라의 눈이다. 땅바닥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카메라-눈은 상황에 대한 명징한 인식을 주지 못한다. 게임기를 조종하듯 로봇을 컨트롤하는 EOD요원들의 시계(視界)는 로봇 카메라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표면이 고르지 않은 도로를 이동하는 카메라는 발작적으로 흔들리고 단속적인 편집에 의해 공간에 대한 감각은 미궁에 빠지며, 빠른 줌과 근거리 촬영은 대상에 대한 식별을 불가능하게 한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요원들은 로봇 카메라가 제공하는 흐릿한 이미지에 의지해 은닉된 폭탄을 찾는다. 그 순간에도 EOD팀장 톰슨(가이 피어스) 하사의 시선은 건물 위 여인에게, 창가의 수상한 사내들에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옥상 남자에게로 분주히 옮겨다닌다. 그 순간 로봇이 끌고 오던 수레의 바퀴가 빠져버리자 톰슨이 직접 폭탄 제거에 나서지만 폭탄 해체용 특수 방탄복을 입고 전진하는 그의 시야는 뿌옇다. 후방에서 엄호하던 충직한 부관 샌본(앤서니 마키)이 긴급 상황에 끼어든 이라크인 청년을 위협해 돌려보낼 즈음,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관찰되고 있는 EOD요원들의 이미지가 보인다. 뒤이어 무탈하게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믿는 순간, 원격 조종 폭탄에 의해 톰슨은 허망한 최후를 맞는다. 카메라가 제공한 오인에 의한 첫 번째 낭패.

이후 전개될 영화의 내용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 프롤로그 시퀀스는 <허트 로커>의 테제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키도록 시각화된, 로봇 카메라가 촬영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선전포고이다. ‘영화는 당신의 시야를 지속적으로 제한할 것이고, 이것은 보기(seeing)에 관한 영화가 될 것이다!’ 전쟁의 지각 방식에 대한 영화로서 <허트 로커>는 요동치는 카메라와 느닷없는 숏의 전환, 탈중심화된 프레임, 공간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을 허용하지 않는 제한된 이미지의 시계만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대상과 세계에 대한 근시안적인 지각, 기계적인 이미지들의 잡스러운 혼효(混淆), 때로는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시점의 제한이 비글로의 비주얼 전략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캐스린 비글로의 선택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목적은 시간이 갈수록 판단력을 상실해가는 EOD요원들에 깊이 동조한 채 전장의 공포를 몸소 체험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스티브 개건의 <시리아나>,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 폴 그린그래스의 <그린존> 같은 전쟁 소재 영화들에서 익히 보아왔던 의사-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연장인데,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무질서한 단편들과 제한된 시점에서 찍힌 이미지들뿐이다. 몇몇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허트 로커>가 앞의 영화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비글로가 ‘보기와 지각’이라는 개념을 전쟁의 본질과 직접 연결시키는 원대한 야심을 현실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트 로커>에서 피력되고 있는 두 번째 이미지 전략이자 좀더 본질적인 목적은 이라크에서 미국의 실패가 어디서 기원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들은 설사 그것이 황량한 사막에서 벌어지는 전투일지라도 전쟁 이미지의 기계적인 재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일급 촬영감독 배리 애크로이드는 폭탄 탐지 로봇에 장착된 카메라가 촬영한 동요하는 화면, 조준경을 통해 본 혼탁한 이미지, 갖가지 폐쇄회로 이미지, 열 추적 카메라 이미지 따위를 연상시키는 거친 화면을 만들어낸다. 전쟁의 지각 방식에 맞춰진 비주얼 전략에 따라 모든 장면은 격렬하게 흔들리는 패닝, 의도적으로 중심에서 이탈한 프레이밍, 잘게 썰린 숏들, 급작스러운 줌인과 줌아웃, 극단적으로 좁혀진 초점으로 찍혀 있다.

오인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지각의 범위에 대한 고의적인 제한은 이라크에서 미국이 겪고 있는 곤경의 형식화이다. 그들은 왜 잘못 보고 오판해서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이라크에서 이런 식의 오인은 일상화되어 있는데, 아군과 적군을 분별할 수 없게 된 상황은 미군이 자행하는 학살에 가까운 폭력의 원인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종잡기 힘든 지각의 한계에서 비롯된 EOD요원들의 오인은 민간인 학살의 원인이 되기보다 요원들 자신의 곤혹스러움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너절한 이미지 정보에 둔탁해져 가는 저들의 감식안과 무감각을 드러내기 위해 비글로는 특별한 전략을 사용한다.

이와 관련해 제임스의 신념은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첫 번째 임무에서 그는 로봇 카메라에 의존하지 않고, 스모그를 뿌려 동료들의 시선을 혼란에 빠트린 채 독단적으로 행동한다. 애당초 제임스는 관행화된 전쟁 지각의 메커니즘을 신뢰하지 않는 인물이다. 샌본은 제임스가 뿌린 연막이 시야를 방해한다고 불평하지만, 관습적 지각 체계에 저항하는 제임스의 단독자적 행동은 계속된다. 이와 반대로 작전을 수행할 때마다 사방을 경계하는 샌본의 눈은 상황이 벌어지는 공간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에 실패하고 만다. 기계적 지각 장치의 일부가 된 듯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는 어느 순간 각 지점들을 연결하는 선들의 결렬에 의해 통제력을 잃는다. 지각의 곤란함을 완고하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허트 로커>의 비주얼 전략은 기계화된 전쟁 이미지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비글로의 능숙한 솜씨는 지속적인 헛다리 짚기 전략에서도 확인된다. 비등점까지 상승하는 서스펜스를 제공하는 폭발물 제거 장면들에서 곧 터져야 할 폭탄은 대부분 잠잠하며, 불길함에서 안도감으로 한발 물러서는 순간 골탕을 먹이듯 터진다. 보이지 않는 적들로 인한 폐소공포가 현저해지면서 무언가 험상궂은 사태가 벌어지리라는 느낌이 커지는데, <허트 로커>의 미장센은 이 혼란과 오인의 장면화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이와 관련해 사막에서 저항 세력과 벌이는 제임스 일행의 교전을 보여주는 장면은 단연 위압적이다. 이 시퀀스의 도입부에서 제임스 일행은 터번으로 얼굴을 가린 미군들을 무장 저항 세력으로 오인해 위협한다. 더이상 같은 편과 적을 분간할 수 없게 된 이들에게 갑자기 총알이 날아들면서 전투는 시작된다. 원거리에 있는 보이지 않는 적과 대치, 무주공산으로 미친 듯이 사격을 해대는 병사들, 카오스적인 이미지가 난무하는 이 장면은 정교하게 설계된 시점 교환으로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EOD요원들의 위치는 적에 노출되어 있으며, 열사의 훈기와 점증하는 불안감으로 저들의 의식은 점차 까무룩해진다. 용케 엘드리지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기지만 조준경에 의지해 적들의 동태를 살피는 요원들의 의식은 희미하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오인의 종착점은 실패를 모르는 전쟁 기계 제임스이다. 폭발물 제거반의 신화가 되어갈 즈음 제임스는 거의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DVD를 파는 이라크 소년이 연루된 사건을 오인한다. 어떻게든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고 마는 그에게 이 사건은 형용할 수 없는 쓰라림을 안긴다. 미국에 두고 온 아들을 연상시키는 이 소년은 제임스에겐 ‘이라크의 아들’이다. 어느 날 저항 세력의 아지트에 잠입한 제임스는 자살 폭탄 테러에 동원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무참히 살해된 한 주검이 그 소년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소년-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동분서주하는 제임스의 판단은 오류로 입증된다.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된 그는 무사히 귀환한 소년을 외면해버림으로써 자괴에 빠진다. 질탕한 피냄새를 풍기는 적의 소굴에서 그렇게 제임스가 이성을 잃어갈 때, 다른 한편에서는 엘드리지와 교감을 나누었던 자애로운 군의관이 또 다른 오판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선량해 보이는 이라크인에 대한 호의가 미온적인 위협으로 바뀌는 순간 묻어둔 폭탄이 가차없이 군의관을 날려버린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폭탄처럼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오인과 무지의 참담한 결과들은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지각에 고질화된 결함을 신호한다.

이라크에서 미국은 여전히 눈뜬 장님이다

진실을 볼 수 없는 자들이 일으킨 전쟁을 묘사하는 영화로서 <허트 로커>는 최근 보도된 바그다드에서의 민간인에 대한 미군 헬기의 무차별 폭격장면과 겹친다. 3년 전 벌어진 이 충격적인 사건의 미장센은 <로이터> 저널리스트의 카메라를 총기로 오인한 미군 헬기에서 저들 무리에 쏟아부은 맹렬한 폭격을 시각화하고 있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 자신의 오해에 대해 저들이 어떤 진상도 규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허트 로커>에서 이런 상황은 점차 의문시되는 제임스의 리더십을 통해 암시된다. 엘드리지가 다리에 총상을 입는 한밤의 거리 수색 장면에 제임스는 “어딘가에 숨어 지켜보며 비웃고 있을 적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샌본을 채근한다. 제임스의 분노처럼 <허트 로커>에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감시자의 시선이 존재하는데, 작전 수행 중인 요원들을 조망하는 익명의 시점, 부임 뒤 첫 번째 임무에서 제임스와 마주치는 이라크 남자, 그 정체가 끝내 밝혀지지 않는 비디오카메라를 든 남자가 등장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비글로는 어떤 명쾌한 실체도 볼 수 없는 미군들의 지각의 불능성에, 사방에서 모여드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시선에 의해 감시당하는 미군들의 왜소함을 겹쳐놓는다. 감시는 감시당하는 자들로 하여금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비참한 자괴감을 갖게 만든다. 감시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제임스의 갈급증은 여기서 비롯됐지만 그의 잘못된 판단은 다른 비극을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매번 목표에 도달하고 마는 제임스의 동물적 감각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그의 분별력 상실이다. 본국 송환을 앞둔 마지막 임무에서 제임스는 온몸에 폭탄을 두른 채 구제를 요청하는 사내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그 자신의 주장대로 이 남자가 무고한 한 가정의 가장인지,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인지는 끝내 묘연하다. 확실한 것은 이 마지막 임무가 878개의 폭탄을 제거한 폭발물 제거반의 전설이 맛본 최초의 실패라는 점이다. 이라크에서 미국의 거대한 공포는 적이 누구인가를 분별할 수 없고, 그들의 실체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흡사 베트남전의 공포와 겹쳐지는 이 거대한 불가해함은 <허트 로커>가 무능한 지각의 곤경에 관한 영화임을 재차 확인시킨다.

캐스린 비글로의 저의는 표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아니라 그 배후에 흐르는 감추어진 전쟁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허트 로커>가 미국에서 이라크의 실패에 관한 영화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것이 이라크의 진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이라크에서 진실로 오인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이빨로 물어뜯어 생채기를 내는 전쟁의 참혹함이 아니라 누구나를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 있는 전쟁 지각 양식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비글로의 전언은 여기에 새겨진다. <허트 로커>가 강렬하면서도 그로 인해 허망하기도 한 묵시록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전쟁 지각의 오인 메커니즘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기본 뼈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현실에 대해 통절한 각성을 부여해줄 대단한 의미는 이 영화에서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확한 지각’이라는 난제를 풀지 못하는 미국의 필연적인 실패에 대한 영화로 읽을 때 <허트 로커>는 깊은 예지를 간직한 심오한 텍스트가 된다.

중요한 순간마다 어긋나는 감각의 오류를 이토록 치밀한 시각 전략을 통해 입증한 영화는 전례가 없었다. 고로 무시무시한 폭탄이 즐비한 전쟁터에 있을 때에라야 존재감이 확인되는 제임스의 과잉 영웅주의는 자못 문제적이다. 가정으로의 귀환이 되레 그의 무기력(시리얼의 숲에 갇힌 이미지)을 가중시키지만, 다시 돌아간 이라크 거리를 보무도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도 위험천만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찌어찌해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겠지만, 언제고 지각의 오인은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나쁜 역사는 반복된다. 진정 우리를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이 눈이 먼 전쟁-기계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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