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의 눈’을 고민한 지가 베르토프,‘몽타주 이론’을 정립한 쿨레쇼프, 푸도프킨,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등 1910년대 초 세계영화사에 한획을 그은 러시아의 영화 유산은 불과 20년도 채 안돼 먼 과거가 되었다. 그만큼 1930, 40년대 소비에트 영화는 추운 겨울이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개인 숭배 때문에 영화는 오로지 스탈린과 당을 위해서만 기능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쟁 영웅들을 기리는 다큐멘터리와 전쟁 소식을 전하는 뉴스 클립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동시에 체제를 비판하고 현실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영화는 제작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봄이 왔다.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기다렸다 듯이 소비에트 영화는 기지개를 폈다. 영화 검열 제도가 일부 폐지되면서 영화제작은 활발해졌고, 젊은 영화인들 다수가 영화계로 향했다. 그야말로 해빙기였다. 오는 4월27일부터 5월9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해빙기 러시아 전쟁영화 특별전)’에서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상영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묘사, 전쟁보다 개인에 방점을 찍는 시선이 상영작들의 공통점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엘렘 클리모프 감독의 1981년작 <안녕>이다. V. 라스푸틴의 소설 <Farewell with Matyoraya>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수력발전소 개발로 마을에 홍수가 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환경파괴로 위기에 처한 마을의 풍경을 안개와 물의 이미지를 통해 섬뜩하게 묘사한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로 자욱한 강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건너는 디스토피아적인 풍경은 개발의 광풍에 휩싸인 지금의 한국사회에도 유효한 메시지다.
전쟁의 어두운 면을 일상을 통해 역설한 작품도 있다. 라리사 셰피트코 감독의 첫 장편작이자 러시아 뉴웨이브의 시작을 알린 <날개>(1966)다. 한때 전설적인 비행사였지만 지금은 평범한 교장선생님으로 살고 있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또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다. 밝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과거를 잊지 못하는 공허감과 상실감은 전쟁이 남긴 또 다른 얼굴이다.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매력적이라 평가를 받았던 마야 볼가코바가 주인공을 맡았다.
역시 같은 감독의 1971년작인 <당신과 나>는 개인의 상실감을 다룬다는 점에서 <날개>와 비슷하다. 차이라면 전쟁이 아닌 ‘어떤 선택’에 의한 상실감이라는 것.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찬양했던 전 세대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나약한 인간을 그린다. 주인공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구할 수 있는 선택을 앞에 두고 부담스러워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용기를 얻고 사람들을 구하기로 결심하지만,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 그는 많은 고민을 하고 고통을 받는다. 한편, 러시아 뉴웨이브를 이끈 엘렘 클리모프 감독과 라리사 셰피트코 감독은 부부 영화인으로, 이번 특별전에서 이들의 작품들이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를 기리며’라는 섹션에서 특별 상영된다.
이 밖에도 한국 관객에게 유명한 미하일 칼라토초프 감독의 <학이 난다>, 게오르기 추흐라이 감독의 <병사의 발라드>, 그리고 198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엘렘 클리모프 감독의 <고뇌> 등 총 10편의 영화가 함께 상영될 예정이다.